우리는 타인의 눈을 의식합니다. 선택을 강요받았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어쩔 수 없는 물리력으로 강요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인지, 어떤 선택이 최선인지 빠르게 판단합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의 기저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자리 잡습니다. 인정되지 않을 때 일그러진 반응이 나옵니다. 희생자 코스프레! 상대를 자연스럽게 가해자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편에 선 사람에게 위로받길 원합니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며 살아온 것입니다.
이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저라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린 조정 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됩니다. 내 생각을 그대로 발설하다가 독침 맞고 쓰러질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소리를 하는 캐릭터로 클 수도, 적당히 멋진 가면에 숨어 비겁한 목소리를 내는 캐릭터로 크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적당한 자기 얼굴로 살다가 대응하기도 하고, 고개 숙여 못 본 척하며 살기도 합니다. 건강하게 조정되지 못한 자아는 가면 속에 숨어서 앞뒤가 다른, 겉과 속이 다른 (겉바속촉?) 자아를 만들어냅니다. 그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때론 좋은 사이로 유지되어온 관계들이 일시에 틀어지기도 합니다. 타인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왜곡된 반응을 합니다. 그 와중에 자신은 옳다고 여깁니다. 때론 내가 잘못 알아들을 수 있고, 내가 잘못 말할 수 있고, 상대의 뜻을 잘못 파악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합니다. 상대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유 중에는 자기 안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많아서입니다. 클리어한 수신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 마이크에도 잡음이 있을지 모른다는 점검도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뜻을 잘 전달하지도 전달받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보이는 수많은 현상들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가 투영된 것입니다. 타인과 자아를 분리시켜 때로는 너와 내가 다르다는 이야기, 때로는 너와 나는 같다는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에고 측면의 '나'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보다 근원에 가까운 '나'의 흐름이기도 합니다. 어떤 나를 내세워 삶을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저는 브런치에서 사색하는 이야기를 봅니다. 자연을 노래하고 세상을 노래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글들은 읽는 내내 행복합니다. 이따금 본질에 벗어난 이야기, 빙빙 돌려 타인을 조롱하는 글, 누군가를 교화의 대상으로 가르치려 하거나,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고 일방적인 하나의 주장만을 내세운 글들은 아쉽게 다가옵니다. 다른 고민 없이 상대를 몰아가는 글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진짜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포커스 맞힌 결과일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주변에서 위로를 얻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만큼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놓치기도 합니다.
글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면 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가는 사람들의 글은 읽는 이를 위로하고 치유하고 행복하게 하고 힘을 줍니다. 저 또한 이 글이 타인을 향한 글이 아닌 제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착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살다 보면 착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도 있지만 때론 삽질하듯 미끄러져 쪼다 같은 인간이 되기도 하고, 때론 뜻하지 않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그토록 혐오하던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저 자신에게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신 차려 살다 보면 언젠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타인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타인을 해치지 않은 인생, 그걸로도 잘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계 세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착한 사람들만 있을 수 없습니다. 악으로 인식되는 사람들도 공존합니다. 내가 선한 의지로 살아내려고 할 때 선하다고 여겨질 만한 세상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판단하는 선과 악은 빛과 어둠 같은 구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선이고, 어디까지가 악일까요? 나에게 친절한 이가 타인을 구박한다면 그는 좋은 사람일까요, 나쁜 사람일까요? 반대로 나에게 못되고 쌀쌀맞게 굴어도 어린아이와 노인분에게 친절한 미소를 보내는 사람은 선한 사람일까요, 악한 사람일까요? 내 안에서도 벌어지는 일들, 우리가 착하다고 여긴 마음은 과연 100퍼센트 순수한 것일까요? 때론 선하지 않다고 여긴 감정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어디로 밀어낸 것일까요?
우리는 균형 속에 살고 있습니다. 치우치지 않으려는 균형감각이 우리의 삶을 잡아냅니다. 때로 기울어져가는 마음을 바로 세우려다가 타격을 입기도 합니다.
선택되지 않은 감정들, 억지로 잠재운 본능들은 무의식에 자리 잡습니다. 그것은 언젠가, 의지적으로 살아내며 견뎌온 에고의 힘이 떨어질 때 고개를 듭니다. 그래서 당황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싶기도 하면서 말이죠. 어쩌면 적당히 때 묻은 환경이라고 여기는 상황에 노출될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야 거부감이라는 것이 사라집니다. 그래야 너와 내가 다르다는 구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순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이면에 자리 잡은 그 허무함, 알 수 없는 분노와 욕망들, 순수를 지향하느라 누른 다른 측면들이 이따금 자신을 괴롭힙니다.
어린 시절 환경적으로 불우하고 슬픈 현실에 놓인 아이들이 있습니다. 자라면서 그 바탕을 딛고 자신의 아이에게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결국 이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나서서 대신 싸워주는 안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타인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부단히 타인을 위해서 노력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는 기쁨도 누립니다. 너는 쓸모없다,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는 목소리를 잠재웁니다. 타인을 돕는 삶이 무의식에서 들여오는 그 목소리들을 사그라지게 만듭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불운함을 이어갑니다. 의지가 꺾인 채 성장 해온 이들입니다. 자신의 저력을 믿을 만한 계기가 없습니다. 이럴 때 이들에게 구원이 되는 것은 타인의 손길입니다. 타인의 손길은 때로 천사의 손길이기도, 신의 손길이기도 합니다. 이때 판타지가 작용합니다. 힘겨운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현실의 밥'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현실의 밥도 '구원의 양식'이 가닿은 곳에 있습니다. 판타지로 현실의 어둠을 내쫓을 수 없다고 믿는 분들에게 저는 항상 이런 말을 합니다. 판타지는 현실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통로라고! 그 문을 여는 과정까지만 판타지가 담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을 열고 환한 빛이 들어오면 또 다른 현실의 내가 움직이게 됩니다. 기도하는 마음은 우주를 불러옵니다. 우주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위로를 얻으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오랜 병에 시달린 자식을 잃은 후배 작가가 내게 카톡을 해왔습니다. 누가 봐도 현실 세계를 잘 일구어 온 사람이지만 그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씩씩합니다. 겉에서 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활기찹니다. 분명 한쪽은 병들어 아픈데, 이상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가두는 듯했습니다. 며칠 전 통화를 하다가 얼핏 말한 책이 있었습니다. 오늘 그게 무슨 책이냐고 물어왔습니다. 영혼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습니다. 오래전 절판된 줄로만 알았는데, 9년 전에 다시 출간되었나 봅니다. 저는 훨씬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라 몰랐습니다. 그냥 가물가물 말했던 제목인데, 그녀가 찾아낸 것입니다. 이것은 목마른 자의 증거입니다. 그녀는 얼마간 그 책 속에서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보이지 않은 세계에 담긴 판타지로 위로를 얻고 상처를 치유합니다.
작가는 선과 악을 모두 관장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며 한쪽만 바라보면 다른 한쪽이 뒤통수를 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에는 선한 사람만 나오지 않습니다. 매력적인 악인을 써야 작품이 성공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는 악하다고 여기는 감정선도 분명 있습니다. 악인을 바늘로 콕콕 찍으며 '얍 죽어라!' 하면 통쾌하지 않습니다. 큼지막한 칼로, 장총으로 쏴대야 시원합니다. 하지만 맨 주먹으로 싸워 이기는 과정이 더 통쾌합니다. 마치 내 힘으로 무찌르는 듯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 있는 폭력성이 해소됩니다. 폭력 게임에 중독성을 보이는 이들을 관심 있게 봐야 합니다. 이들이 현실로 나아갈 기회를 마련해줘야 합니다. 적당한 게임, 게임이라는 인식 속에 있는 아이라면 관심을 갖고 조금 지켜보면 좋습니다. 현실의 불만이 가득한 아이의 폭력성이 게임으로 해소될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좋은 처방입니다. 아이 안에도 균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균형은 곧 현실의 친절한 아이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자극적인 시각화 게임은 지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할 위험한 게임은 아이의 뇌에 어떤 자극을 줄지 고민해야 할 부분입니다.
너무 선정적이거나 영혼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공포 영화도 저는 보기 힘듭니다. 오랜 시간 저도 천사류 영화만 봤습니다. 하지만 결국 다른 쪽 마인드 없이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은 반쪽 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제대로 그려야 선을 선으로 잘 묘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호러물 같은 경우, 의도적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배척하면서 내 안에서 상상으로 키워낸 공포감이 더 크게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무의식에 쌓입니다. 그러다가 어떻게든 표출됩니다. 내가 짓누른 그 감정은 타인을 통해서라도 보게 합니다. 결국 세상은 균형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못 오해하셔서 시크릿에서 좋은 것만 심상화 하면 좋은 세상만 열린다고 한 부분과 헷갈려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시크릿도 반쪽만 다룬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균형에 대한 이야기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과 악으로 이름 붙인 이분법으로 해석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주의를 기울인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그토록 많은 호러물들과 폭력성을 다룬 소설과 영화들이 끊이지 않고 생성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대체물인 듯싶습니다. 요새 액션물들을 가끔 봅니다. 공포영화도 아시아권 빼고 이따금 봅니다. 아시아권 공포영화는 정말 무섭습니다. 자극만 극대화해서 균형을 잡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결국 보는 이들에게 더 큰 공포를 심어줄 우려가 있습니다. 저는 약간 스릴러와 시간의 개념이 얽힌 이야기들이 좋습니다. 뇌에 신선한 자극 정도가 좋은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이야기, 현실 너머의 세상을 궁금해하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세상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펼쳐집니다. 한때 시크릿 같은 것들이 유행하면서 반쪽 이야기들이 떠돌았습니다. 좋은 것들만 취할 수 있다니,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반대급부들이 무의식으로 떠밀려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젠가 왜곡된 형태로 반쪽 목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우린 지금 내가 서 있다고 여기는 쪽에서 다른 쪽을 손가락질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세상은 구분 없는 '통'입니다. 모두 내 얘기의 다른 구분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행길, 어떠한 것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지나오면 가벼울 수 있습니다. 저항하면 그 저항력에 의해 더 큰 저항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가볍게 지나오는 연습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어딜 봐! 눈 깔어!' 하는 대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애초에 빙 둘러서 조심조심 걷는 방법도 있겠지만, 숨은 이들까지 다 피할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그야말로 눈 깔고 조용히 지나오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때론 치고받고 싸울 수 있습니다. 눈 깔아 대상들이 우리 삶에 차고 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출몰 지역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정신 차리고 잘 지나와야 합니다. 그곳에 머물며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방법도 있겠지만, 슈퍼맨이 날아오려면 옷을 바꿔 입고 오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전에 정신 챙겨 그곳을 지나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삶은 풍성한 이야기들도 가득합니다. 때론 눈 깔아 인간들을 상대해야 할 때도 있고, 때론 천사 같은 이들과 행복을 나눌 때도 있습니다. 그 무엇도 지나고 나면 사진 한 장과 같습니다. 그 모든 사진들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천재 시인이 표현한 소풍처럼, 우리는 삶을 잘 살아내고 가면 됩니다. 괜히 삽 들고 땅만 파다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 손에도 삽이 들려있네요. 작은 삽이라 속상하게 여길 수 있었는데, 꽃삽이네요. 의미를 부여하면 그 세계가 펼쳐집니다. 꽃을 심는 마음으로 잘 살아내야겠습니다.
문득, 쓰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 이 생을 진실로, 진심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
곧 설이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새해를 리셋할 수 있는 기회가 또다시 주어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시간도 날짜도 모두 개념일 뿐이더라도 다시 새 공기 마시듯 새해를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