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라는 다수에게 익숙한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낯선 시선에 의해하염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공간이 된다.
그렇게 멀어진 학교는 소녀가 글을 읽는 것에서 멀어지게 했고 대신 섬세한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어쩌면 다른 선택을 했다 해도 같은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만남의 순간 마지막이 있음을 부정하고 싶은 너무도 어울리는 두 사람의 만남...
삶은 영화나 소설과 달리 우연이다. 하지만 영화도 결말을 알기 전까지는 모두 우연일 뿐이다.
우연한 만남, 그리고 교감,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끌림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사후적이다. 끼워 맞춘 퍼즐에 불과할 지라고 현실에서는 끌림에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일 뿐이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냥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천천히 되돌아보면
얽힌 실타래 같은 매듭이 한순간 풀리기도 한다. 그것은 반복의 축이 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사후적인 해석마저도 미리 계획된 것일까. 그저 작가가 경험한 것의 흔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람에게 행운은 첫 번째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탄생한다고...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떤 경우일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했기에 내가 탄생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실망의 실체가 없었기 때문에 나를 지키는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어지는 두 번째 만남, 습지 소녀는 그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조르주 캉길렘은 말한다. 사람과 자연의 차이는 자연은 탈가치적이고 사람은 가치적인 데 있다고... 자연에 동화된 삶을 살다 보면 자연의 법칙에 익숙해지는 것일까...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의 법칙을 따라도 되는 것일까... 습지 소녀는 자연이 가족이었기에 그저 자연의 법칙이 삶의 방식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이 영화가 나에게 준 쉽게 풀 수 없는 과제인 듯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시작과 이어진다. 천천히 소녀의 삶을 되감기 하듯 되돌아본다. 감성에 시선을 맡기고 끝까지 따라갔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퍼즐을 맞추게 한다. 그리고 울림과 함께 풀리지 않는 과제를 선사한다.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만으로 나는 늘 충분했다. 파도가 가면 오듯이 자연이 인도하는 대로 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 비극이라고 규정짓지도 않는다. 죄는 더더욱 아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남기 위해 그러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가끔 먹잇감이 살아남으려면 포식자는 죽어야 한다. 이제 나는 습지가 되었다. 나는 백로의 깃털이며 물가에서 씻겨 나가는 조개껍데기이자 반딧불이다. 반딧불이 수백 마리가 습지 깊은 곳에서 반짝일 때 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저편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끝으로 습지 소녀가 자연의 아름다운 형상을 섬세한 시선을 통해 손으로 옮겨 그려낸 책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