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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시간 May 20. 2024

서양 미술사 읽기 5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전투적인 교회

12세기


1066년 영국에 상륙한 노르만 인들은 그 당시 발전된 건축양식을 들여왔다. 이러한 양식은 영국에서는 노르만, 유럽대륙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알려졌으며 이후 백 년 이상 번창하였다. 당시 교회는 유일한 석조 건물로,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 노르만 양식, 즉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는 육중한 각주가 받치는 둥근 아치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창문도 장식도 별로 없어 중세의 성城을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중후한 힘이 느껴진다. 이 강력하고 도전적인 석조건물들은 ‘전투적인 교회’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바실리카 성당에 주로 사용되었던 목조지붕은 위엄이 없고 불에 취약하여 새로운 기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노르만 건축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새롭게 찾아낸 방식은 기둥들 사이에 아치나 늑재를 서로 엇갈리게 걸쳐놓고 이 늑재 사이의 삼각형 부분을 메우는 것이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에 조각 작품들로 장식을 시작한 것은 프랑스에서였다. 남프랑스 아를에 있는 12세기말 성 트로핌(Trophime) 대성당의 현관은 이 양식의 가장 완전한 예 중 하나다. 이 교회의 현관에 새겨진 조각들에는 지상에서 우리들의 삶의 최종적인 목표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새겨져 있다. 교회 내부의 모든 부분들도 그 목적과 의미에 맞게 세심하게 도안되었다. 벨기에 리에주에 있는 한 성당의 세례반은 신학을 위한 미술가들의 지혜가 담긴 또 다른 예이다. 12세기는 십자군의 세기로, 이 시기는 그 이전에 비해 비잔틴 미술과의 접촉이 많아서 많은 미술가들은 동방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상들을 모방하였다. 이 시대 미술가들은 사물을 본 대로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회화는 사실,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되어가고 있었고 보다 단순화된 표현 방법으로의 복귀는 중세 미술가들에게 보다 복잡한 형식의 구성을 실험하는 새로운 자유를 주었다. 색채 또한 형태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나타나는 음영의 농담을 연구하고 모방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자기가 좋아하는 색채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자연을 모방할 필요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은 이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을 전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교회의 승리

13세기


동유럽에서는 미술 양식들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서유럽은 언제나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이념을 찾아 한시도 쉬지 않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못했다. 새로운 방식은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된 고딕양식이었다. 서로 교차하는 아치를 이용하여 교회의 둥근 천장을 만드는 방법은 육중한 돌로 벽을 쌓을 필요가 없어져 큰 창문을 낼 수 있었다. 이것이 돌과 유리로 만들어진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에서 발전된 고딕 식 대성당 건축의 중심 원리다. 고딕식 교회 건물은 마치 자전거 바퀴가 거미줄 같은 살에 의해 그 형태를 유지하듯 돌 구조 사이에 걸려 그 하중을 지탱하여 각 부분에 균등하게 무게를 배분시키는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이 악의 공격에 대해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전투적인 교회’라는 인상을 주었다면 고딕 성당들은 신자들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성당의 벽은 차갑거나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 루비나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졌다. 이 기적과 같은 건물들은 마치 하늘의 영광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이 건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정면을 꼽을 수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미술가는 성인들의 상을 건물의 구조에 딱 들어맞게 맞들어 단단한 기둥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첫 번째 고딕양식인 샤르트르 대성당의 북쪽 현관을 장식한 고딕 양식의 미술가는 성상들을 하나하나 살아 있는 듯이 묘사했다. 이러한 방식의 고딕 양식의 조각상들은 거의 다 특유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신자들은 그 의미와 신탁을 이해하고 묵상할 수 있었다. 이 조각상들은 성스러운 상징일 뿐 아니라 하나의 도덕적 진리를 엄숙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12세기 후반기의 건축으로 알려진 샤르트르 대성당 이후 12년 뒤에는 수많은 화려한 대성당들이 프랑스와 그 이웃 나라들인 영국, 스페인, 그리고 독일 등지에 생겨났다. 고딕양식의 미술가들은 잊혔던, 옷을 입은 육체를 묘사하는 고대 예술 공식을 찾았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미술가들이 육체의 이미지를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고딕 미술가들은 이 모든 방법과 기교로 성경의 이야기를 한 층 더 감동적이고 신빙성 있게 전달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작품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그것으로부터 위안과 교화를 받게 하기 위해 애를 썼다.

13세기 일부 미술가들은 석상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시도에 있어서 한층 더 깊은 발전을 보였다. 13세기 북유럽 조각가들의 주된 업무가 성당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다면 당시 북부 화가들은 필사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이 삽화의 화풍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삽화와는 상당히 달랐다. 당시 미술가는 사물을 실제로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옛 서적들에 실린 장면을 묘사하거나 재배치하고 그것들을 다른 구조 속에 맞게 만들어서 마침내 모르는 유형의 장면도 그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습득했다. 그러므로 중세에는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의 초상화는 없었다.

대성당의 시대인 13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국가였다. 당시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의 조각가들은 13세기 후반, 자연을 보다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프랑스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하고 고전 건축의 표현방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비잔틴 제국과 밀접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화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13세기가 말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북유럽의 대성당 조각가들을 따라잡을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회화 전체에도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인들에게 조각과 회화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뛰어넘게 만든 것은 비잔틴 미술이었다. 비잔틴 회화의 명암법과 단축법의 원칙에 대한 이해와 이러한 방법론의 무장은 고딕조각의 실물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대입시킬 수 있었다. 이 같은 이탈리아 미술은 미술사 책에서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통례로 일컫는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에게서 확인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조토의 출현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의 역사에 있어서는 새로운 장이나 새로운 시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벽에 바른 석고가 채 마르지 않았을 때 그리는데서 유래한 프레스코이다. 조토는 단축법과 입체적 표현법 그리고 그림자 묘사를 활용해 평면에서 깊이 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해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은 환영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조토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퍼져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겼다. 프랑스 대성당의 조각 작품을 만든 거장들이 그들의 명예를 그들이 봉사했던 대성당으로 돌린 것에 비한다면 조토는 미술의 역사에서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시대 이후로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美術史)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귀족과 시민

14세기


13세기는 대성당의 시대로 대성당에서 거의 모든 분야의 미술이 각자 맡은 역할을 해내며 14세기와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 미술의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12세기 중반 유럽이 인구가 적은 농부들의 대륙으로 권력과 학문의 중심지가 수도원과 귀족들의 성이었다면 150년 뒤 이 도시들은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벗어나 도시로 이주해서 권력자의 궁전에서 자신의 부를 과시했다.  나날이 발전하고 번창하는 도시에서는 많은 세속적인 건물들이 필요했다. 14세기 고딕 양식 건축가들은 초기 성상의 장엄한 외관에 만족하지 않고 장식과 복잡한 트레이서리를 통해 그들의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14세기, 가장 특징적인 조각 작품들은 교회를 위해 만들어졌던 수많은 석조물들이 아닌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귀금속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들이었다. 14세기 화가들의 우아하고 섬세한 세부묘사에 대한 집착은 <메리 여왕의 기도서>라고 알려진 영국의 기도서와 같은 유명한 필사본들에서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와 같이 우아한 설명과 충실한 관찰이라는 두 요소들이 점차 하나로 융합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들어와서였는데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풍조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에서는 조토의 미술이 회화의 모든 개념에 변화를 일으켰다. 조토는 피렌체의 시인 단테와 동시대인으로 단테는 그의 <신곡>에서 조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조토의 방식이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에 영향력을 넓혀간 반면 북쪽의 고딕화가들은 남유럽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취향과 양식이 영향을 준 곳은 시에나로 이곳의 화가 두초는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끊어버리지 않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 노력하였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라틴 교회의 지배를 받는 유럽은 하나의 큰 단위를 이루고 있었으며 ‘다른 지방의 것’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업적이 배척당하거나 하지 않았다. 14세기말의 이러한 양식을 역사가들은 ‘국제적 양식’이라 불렀다. 국제적 양식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관찰력과 아름답고 섬세한 사물에 대한 그들의 취향을 그들의 주변세계를 묘사하는 데 적용했다. 그들의 관심은 점차 성경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을 찾는 것에서 자연의 일면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변해왔다. 새롭게 얻은 자연에 관한 지식을 14세기 거장들이 했던 것처럼 종교미술에 적용시키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제 미술가들의 임무는 변했다. 미술가는 자연으로부터 스케치를 할 수 있어야 했고, 또 이것을 그의 그림에 옮겨 담을 수 있어야 했다. 미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의 작품에 얼마나 뛰어난 세부묘사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술가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이 했듯이 인체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얻어 그것을 토대로 조각과 그림을 제작하려 하였다. 미술가들의 관심이 이런 방향으로 변하자 중세미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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