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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only living boy May 14. 2019

사랑 여행기 [파리 편]
나는 파리로 간다네

누가 물으면, 나는 파리에 갔다고 전해주게.

"난생처음 '파리'라는 이름을 들으며 '파리'에 당도한 인물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파리, 오 파리. 나는 오래된 역사의 흙냄새와 사람들의 묵은 땀 냄새와 자유를 갈망하는 피의 냄새를 맡았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단체관광객들도 자유여행을 온 것이듯 이 도시 어디든 자유가 있다. 근 천년을 쌓아 올린 대성당, 수백 년 동안 가꿔진 왕가의 정원, 널찍한 광장(지금은 시음 행사를 열고 있는) 등이 거미줄처럼 이어진 도시.


 파리 거리를 다니다 보면, 난데없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 중세 혹은 근대시대의 파리로 꼭 한 번은.

 중절모를 쓰고 검은 턱시도를 입고, 잘 닦인 가죽 구두를 신고 한번 걸어보고 싶다. 사람들을 만나면 모자를 살짝 들어 인사를 하고, 카페에 들어가서 여송연을 피우며 친구들과 예술을 논하고 싶다. 다음 해에 함께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가서 모차르트의 연주회를 보러 갈 계획을 세울 것이다.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가보고 싶기도 하고, 가로등 없는 센 강 주변을 산책해보고 싶다. 어느 날에는 성대한 댄스파티에 초대되어, 후작의 귀한 따님과 함께 사교댄스를 추어보고 싶다. 

 대부분의 날에는 집에 들어앉아 깃털 펜대에 잉크를 묻혀 편지를 쓰고, 불에 달군 잉크로 만든 도장을 찍어 봉인한다. 한겨울에는 작은 화덕을 계속 지펴놓으면 된다. 하인에게 편지 배달을 시키고 창밖으로 눈보라 치는 정경을 바라본다. 주방의 하인에게 오늘은 응접실에서 저녁을 먹고 싶으니 접시 하나에 고기 한 덩어리만 올려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와인은 이탈리아 키안티 지방에서 가져온 것을 준비하라고 지시한다. 없으면 마차를 보내 근처 백작의 집에서 빌려오라고 한다. 

 눈보라를 바라보며, 지난 댄스파티를 생각하며 아름다운 후작 따님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뭘 먹고 그렇게 아름다울까. 다음에 만나면 그녀에게 청혼을 해야지. 연적이 있다면 결투를 신청해 죽이거나 죽든가 둘 중 하나다. 어차피 그녀를 얻지 못하면 죽는 게 낫다.

 도시를 걸어 다녀 보면, 정말 그런 날들로 돌아가 보고 싶은 기분이 마구 샘솟는다. 그것은 파리라는 도시가 유구한 역사 속에서도 그 매력을 잃은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파리의 발상지는 시테 섬이다. 시테 섬을 딛고 선 노트르담은 벌써 천 년여 전에 착공하였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내부가 파괴되고 가톨릭 사제들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때에도 성당은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다. 위대한 나폴레옹의 대관식도 지켜보았다. 파리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의 얼굴도 똑똑히 보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의 가장 커다란 눈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거대한 세 개의 문과 높이 솟은 양옆의 탑, 정교하게 깎인 장식들, 깊고 우직한 종소리. 

 고등학생 시절, 그 어떤 것도 노트르담의 꼽추 같은 이상적 남성이 되려는 나의 꿈을 막을 수 없었다. 야간 자습 시간이었고 나는 노트르담 대성당 안에 있었다.

 부서뜨릴 듯이 돌멩이를 꽉 쥐고, 목숨을 걸고 에스메랄다를 지켜내는 일 말곤 내게 미래가 없었다. 나는 곧 카지모도요 카지모도는 신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여쁜 에스메랄다를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혼절한 에스메랄다를 위해 대성당을 사수해야만 했다. 지금도 그 장면을 생각하니 목 뒤로 전율이 흐른다. 정말 농담이 아니다. 

 쾌걸 조로를 읽기 전까지 한동안 '노트르담의 전율'은 계속 흘렀다.


 파리가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이유는 도처에 우리의 기억이 산재해있기 때문이다. 몽마르뜨 언덕을 오르기 전 빨간 네온사인이 빛을 발하는 물랑루즈 댄스홀을 바라볼 때, 우리는 어디 키르기스스탄의 댄스홀을 볼 때와는 다른, 익숙한 느낌을 받는다. 젊은 극작가(이완 맥그리거)가 새틴(니콜 키드먼!)의 나비 같은 속눈썹을 그윽이 바라보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면.

 제시와 셀린느가 9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노트르담 대성당 건너편,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책방에 들어가면서 기억을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나간 시간, 운명의 실타래로 이어져 있는 사랑을.

 레미제라블을, 모파상을, 조지 오웰의 파리에서의 밑바닥 생활을 읽은 사람이라면 파리라는 도시에서 한 순간이라도 심심할 수 있을까? 물론 결이 다를 수 있지만, 누구나 어떤 매개를 통해서든 파리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없다고?

 궁금하다. 난생처음 '파리'라는 이름을 들으며 '파리'에 당도한 인물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한여름 파리의 햇볕은 따사롭지만 끈적이거나 짜증이 날 정도로 강렬하지가 않아서 기분이 좋다. 산들바람이 솔솔 불어와 시원하다. 돌 타일을 깔아놓은 골목의 길바닥은 햇볕과 그늘을 동시에 드리우고 있다. 고양이도 살며시 걷는다. 하늘에 뜬 뭉게구름은 오고 가며 해를 가려준다. 사람이 살기에 아주 좋은 날씨. 세상을 관찰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날씨.

SHAKESPEARE & COMPANY 서점의 타자기. 나도 아름다운 무언가를 쳤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가까이에서 합주를 하는 거리의 악사들을 보았다. 누가 더 허름하게 입었는지 대결하는 것만 같은 두 남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바이올린을 켜고 다른 한 사람은 시타를 연주한다. 그들은 파리라는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들이 설 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센 강변을 따라 걷는 길에 늘어선 가판대를 만날 수 있다. 형형색색의 꽃들, 파리 정경을 그린 그림들, 유명인들을 그린 초상화, 오래전 파리의 모습을 찍은 사진. 

 에펠탑이 그려진 자석, 펜, 자, 책받침, 티셔츠, 엽서, 컵, 열쇠고리 등 값싸게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에 파리의 정경을 넣어 비싸게 팔고 있다. 내 생각에 기념품은 가장 기념할 게 못 되는 물건들이다. 조잡하고 노골적이다. 나는 청첩장보다는 알쏭달쏭 넌지시 마음을 표현하는 작은 사랑의 쪽지가 더 좋다......


 고층 빌딩이 많지 않아 시원하게 뚫린 느낌을 주는 파리의 시내. 강변만 따라 걸어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했다. 오르세 미술관은 근 30여 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미술관으로 위대한 19세기(정말로)의 미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회전문을 돌아 들어가면,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를 받게 된다. 검색을 마치면 티켓 오피스가 나오는데,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전 세계 누구나 공짜이다. 학생을 위한, 예술을 위한 도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잘생긴 검표원을 거쳐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크지 않은 공간에 생각보다 많은 예술 작품들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다. 낭만주의, 인상파, 사실주의 등등의 이름으로 구획을 나누고 시대별로 몇십에서 몇백 정도의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사람들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고개를 빼꼼 내밀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켜보기도 한다. 초창기 휴대폰처럼 생긴 기계를 귀에 대고 박물관의 오디오 해설을 듣는 사람들, 몰래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물론 금지되어 있지만), 그림 앞에 태연히 주저앉아 수다를 떠는 사람들.


 일전에 크로아티아에서 작은 규모의 미술관을 홀로 방문한 일이 있다. 돌벽에 그림 몇 점이 걸려 있던 소박한 건물. 그땐 참으로 힘이 넘쳤고 무료했다. 나는 젊은 청년이었고 세상에 떠다닌다는 모든 것들을 체험하고 싶었다. 머무르며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지만 가만히 머물지를 못했다. 항상 충동적이었고, 허기를 달래줄 여행이 필요했다. 희망적이었던 만큼 얼마나 외로웠는지. 누구들은 홀로 떠난 여행을 '즐거움'이라고 여겼지만 내겐 '시험'이자 '통과의례'이자 '살기 위해 먹는 행위'였던 것을.

 

 미술관을 나오며 하늘과 나무와 개미가 내다보이는 흔들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옆에 놓인 의자에 사랑하는 여인이 앉아있다고 상상해보았다. 그랬더니 그녀가 보이더구나.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띠어지더구나. 기다림에 지친, 아니 미친 사람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역만리 밖에 두고 떠나와 홀로 걷는 젊은이의 마음에 그리움이란 감정은 우물에 푼 독과 같다. 뾰족한 대안이 없는 그리움은 나를 정말 쥐약 먹은 쥐처럼 아프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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