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only living boy Jun 25. 2019

사랑 여행기 [엑상 프로방스 편]
사랑은 곧 관심이다

당신은 그녀(그)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나? 그가 한 말을 기억하나?

 "모든 게 예전 그대로이고, 달라질 이유 없는데, 내가 그대를 그리는 것은 한여름밤의 꿈."


 마르세유를 출발해 아를로 향하는 버스 안. 고흐가 사랑했다던 작은 도시. 우리는 남프랑스의 순수한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그 마을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여자 친구는 여행을 계획하는 단계부터 그곳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마르세유에서 단번에 아를로 향하는 버스는 없었다. 마르세이에서 가까운 액상 프로방스라는 도시를 거쳐 가야만 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햇살이 너무 따가워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을 덩달아 따라갔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걸었다.

 아를로 향하는 버스는 여자 친구가 알아보았던 가격보다 적어도 5배가 더 비쌌다. 그녀는 대체 무엇을 찾아본 것일까? 하지만 나는 불평할 수도 없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나는 찾아보지 않았으니까. 내 생각엔 요리를 하지 않은 사람은 맛에 대해 불평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여자 친구의 얼굴은 실망과 당황이 교차하는 표정이다.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그녀가 실망하는 상황은 정말 싫다. 나는 언제나 그녀의 기분이 좋길 바랐기 때문이다. 무수한 상황들이 마치 짜인 것처럼 잘 맞아떨어져서 신이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길 바랐다. 특히 여행 중에는 더욱 말이다. 


 결국 우리는 버스를 포기하고 근처의 기차역을 찾아갔다. 하지만 역시나 유럽의 기차 사정은 가격이 터무니없다. 몇십 킬로만 가면 되는데...... 실망한 기색을 감출 수 없는 여자 친구와 함께 벤치에 잠시 앉아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았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나를 돌아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아를에 안 가도 돼."

 나는 몸을 떨며 담배꽁초에 불을 붙였다. 그녀가 다시 무언가를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의 진짜 마음을 알아야만 했다. 

 "오빠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나는 오늘 하루가 우리의 최고의 하루가 됐으면 좋겠어."

 "아를은 다음에 가자. 엑상 프로방스도 처음이니까 오늘은 여기를 둘러보자."

 나는 그녀가 엑상 프로방스라고 말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우리가 난생처음 보는 남프랑스의 한 마을에 있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으니까.

 "그래! 이곳을 구석구석 탐험해보자."

 우리는 일어나 기차역을 나섰다. 기차역 한가운데 누구나 연주하도록 놓인 피아노가 있었는데, 너무 작은 흰 티셔츠를 입은 근육질 백인 남자가 앉아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그 남자 뒤에서 여자 친구는 발걸음을 멈췄다. 몇몇 아주머니들도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그가 요리까지 잘한다면 나는 그를 폭행할지도 모른다. 


 분수의 도시라는 액상프로방스에는 150여 개의 크고 작은 분수가 널려있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다. 골목 하나 돌아서면 분수 하나가 물을 뿜어내고 있다. 물은 하도 깨끗하여 마실 수도 있다. 연잎이 동동 떠다니는 작은 분수가 있고, 대규모 웨딩 케익을 연상시키는 삼단 분수도 있다. '엑상 프로방스'라는 이름은 물이 많이 솟아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로마의 장군 섹스티우스가 이곳을 와보고 그 풍부한 수자원에 감동하여 '아쿠아에 세쿠스티아에(섹스티우스의 물)'라고 이름 붙였다. 물이 많아서 도시 전체가 푸른빛을 낸다. 해가 움직일 때마다 하얗게 반사되는 빛으로 인해 마을은 언제나 오전 11시 반처럼 환하다.  


 아를이 고흐의 마을이라면 액상프로방스는 폴 세잔의 마을이다. 세잔의 아틀리에부터 그와 관련된 미술관과 박물관, 기념비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거리마다 찾을 수 있다. 

프랑스식 햄치즈 샌드위치. 크로크 무슈. 달달한 토마토와의 앙상블. 

 물이 흐르는 골목 사이를 빠져나가다가 한 멋진 귀퉁이 카페에 들려 크로크 무슈와 음료 한 잔을 마셨다. 주문하지도 않은 샐러드가 곁들여 나와 나의 기분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의외성을 아주 좋아한다. 어쩌면 계획한 일이 성공하는 것보다도 계획하지 않은 일의 갑작스런 성공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왠지 나는 축복받은 행운의 사나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별로 계획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의외성에 많은 기대를 걸어야만 하는 상태이다.

 아무튼 서비스 샐러드는 토마토를 베이스로 한 것이 맛이 참 좋았다. 남프랑스의 토마토는 설탕을 뿌린 것처럼 달았다. 내겐 크로크 무슈보다 오히려 샐러드가 더 입맛에 맞다. 가끔씩 그런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 그럴 때는 기분 좋아해야 할지 아까워해야 할지 분간할 수가 없다.


 크로크 무슈는 흰 식빵 사이에 햄과 치즈를 끼워 넣고 맛있게 구워낸 프랑스식 샌드위치이다. 쉽게 말해 햄치즈 샌드위치인데 식빵 겉면을 아주 바삭하게 구워낸다. 그뤼에르 치즈를 넣었다고 하는데 내 입맛엔 좀 짜다. 그래도 바삭한 것이 인간이라면 싫어할 수가 없는 맛이다. 내 여자 친구는 샌드위치를 좋아하지 않는데 크로크 무슈에는 굉장한 흥미를 보였다.

 그녀는 약간 그런 식이다. 그녀는 새우에 환장하지만 새우볶음밥을 먹지 않는다. 그녀는 어묵을 좋아하지 않으나 길거리에서 파는 꼬치 어묵만 좋아한다. 그녀는 계란 노른자를 먹지 않는데 떡볶이 국물에 비빈 노른자는 먹는다. 처음에 나는 영원히 그녀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며 그런 취향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인정하고 그러도록 놔두기만 하면 된다. 나는 닭에게 미안할 만큼 달걀노른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손해 볼 것이 없다. 다만 약간 힘든 점은 그런 취향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기억력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프랑스에서는 아주 인기가 많아서 맥도날드에서도 '크로크 맥도'라는 메뉴를 만들어 팔고 있다.  


 날이 너무 뜨거워 골목골목 바닥에 물을 뿌려놓았다. 큼직한 돌을 길게 이어 만든 길은 흠뻑 젖어 하얗게 빛을 반사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걸었던 그 길들을 모두 이어 붙인다면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 이어질까? 한반도를 가로지를 수 있을까?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아직 지구를 한 바퀴 돌지 못했다. 그러니 아직도 여기 이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점심때엔 문을 닫아놓았던 가게들도 오후를 맞이하며 문을 열었다. 골목을 걷다 마카롱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작은 가게에 들렀다. 너무나 작아 몸을 구겨 넣어야만 했다. 물론 나는 그리 큰 편이 아니라 고개를 약간 숙이기만 하면 되었지만 큰 사람들은 구겨야만 했다는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보통 키가 크니까 말이다. 

 일본 여인이 혼자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마카롱은 각종 색을 입힌 작은 샌드위치 쿠키같이 생긴 것인데, 여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 같다. 실제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조건을 많이 갖췄다. 작고, 귀엽고, 오색찬란하고, 다양하고, 달다.

 아마도 내 예상엔 마카롱을 처음 만든 사람은 바람둥이 남성이었을 것 같다. 그는 여자를 너무나 잘 안다. 그는 개발 중인 마카롱을 먹이며 수많은 여자들을 홀렸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녀들을 울렸을 것이다. 미치광이 마카롱 개발자. 우리는 바닐라, 모카, 그리고 블랙 트뤼풀이 박힌 푸아그라 맛 마카롱을 사서 밖으로 나왔다. 일본 여인은 달콤한 미소를 보였다. 나는 남프랑스의 햇살 아래서 녹아버릴 것 같았으나 여자 친구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전혀 외국인 같지 않아. 꼭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같은 기품이 있어." 내가 말했다. 

 "마음에 들어?" 

 "뭐가?"

 "주인아주머니가 말이야."

 "아주머니라니. 아직 한창이신데." 내가 멋쩍게 웃었다. 괜한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 


 바람이 골목 사이를 침투해 그늘 밑에 서 있으면 시원하다. 우리는 잠시 커다란 성당 그늘 밑에서 피서를 즐겼다. 끝없이 분수를 타고 흐르는 물을 튀기며 장난을 쳤다. 그녀는 결국 짜증을 냈다. 나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끝없이 장난을 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성숙한 여자들은 어느 정도 선을 넘으면 짜증을 낸다. 나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을 가끔씩 주체할 수가 없다. 유럽에서는 어느 마을에 가나 대성당 혹은 중소 성당을 찾을 수 있다. 그것들은 큰 그늘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유익함이 있다.

교회와 성당은 높다라서 좋은 그늘막이 된다.

 도시를 몇 바퀴 걸으니 슬슬 길이 훤하게 보였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로타리 광장이 있고 거기서 모든 길은 시작된다. 돌길 위를 내딛는 여자 친구의 작은 운동화는 밑창이 조금 닳아 있었다. 바깥쪽만 닳아가는 것을 보니 그녀의 걸음이 O자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네가 자기 자신도 제어가 힘들 만큼 서둘러 걷는다고 생각했어. 마치 경보하듯이 말이야. 널 보고 있으면 계속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어." 내가 여자 친구에게 말했다.

 "내가? 언제?" 그녀가 나를 돌아다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일터에서."

 "아, 우린 항상 일이 바빴잖아. 영화관 일이 얼마나 정신없는 건지 알잖아."

 "아니, 바쁜 건 논외로 하고, 네 걸음이 말이야. 마치 펭귄이 경보하는 것 같았어."

 "무슨 말이야, 그게."

 "칭찬이야."

 "내가 어떻게 걸었는데?"

 "그냥, 상체는 이렇게 꼿꼿이 하고 골반이랑 허벅지만 이용해서 이렇게 이렇게 좌우로 밀고 나갔어."

 "그게 뭐야. 엄청 이상한데."

 "지금도 그렇게 걸어."

 내가 그 얘기를 꺼내자마자 그녀는 자신의 걸음을 점검해 보았다. 직후부터 걸음걸이가 매우 불편하고 어색해졌는데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걸음걸이에 엄청난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그것 외에는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어져 자신이 남프랑스의 수백 년 된 돌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펭귄처럼 걸었다. 갑자기 그녀는 배를 내밀고 어깨를 뒤로 젖히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이 웃기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짜증을 낼까 봐 그냥 땅만 보고 걸었다. 

 

 슬슬 햇볕이 힘을 잃어갔고 골목은 아이보리색으로 변해갔다. 우리는 한동안 저녁 메뉴에 대해 상의하며 거리를 거닐었다. 걷는 여행의 아주 좋은 점 중 하나는 많이 걷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배가 고파져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 외에는 별다른 게 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남프랑스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색 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했고 그것은 나를 당황시켰다. 나는 그런 음식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를 만족시키려면 아주 괜찮은 아이디어를 떠올려야만 했다. 

 남프랑스 소개서에서 읽은 짤막한 내용이 떠올라 내가 여자 친구에게 운을 띄웠다. 
 "마르세유 항구엔 부야베스 연맹이란 것이 있대."

 "부야베스 연맹?"

 "부야베스가 유명한 음식이 되자 이것저것 잡탕이 됐대. 그래서 완전히 난잡한 음식이 돼버린 거지. 그걸 방지하려고 부야베스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재료들을 정한 연맹이야. 그 재료들이 들어가야만 부야베스라는 거야."

 "이름이 너무 귀엽다."

 "그럼 우리 오늘 저녁은 부야베스를 먹으러 갈까?"

 "그럼 다시 마르세유로 돌아가야겠네, 이제."

 나는 그녀를 만족시킨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씩씩하게 마르세이로 걸어 나갔다. 액상 프로방스에서 보낸 짤막한 오후 나절. 아이보리색 햇볕이 하얗게 반사되던 분수. 여행이 인생에서 이렇게나 중요한 이유는, 굳이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이렇게나 기억이 선명하게 남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 여행기 [마르세유 편] 가장 프랑스답지 않은 도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