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only living boy Aug 26. 2019

사랑 여행기 [피렌체 편]
다쳐도 좋아

행복한 옥수수 서리

 아침 겸 점심으로 펜케이크를 먹고 난 후 우리는 다시 깊은 잠에 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즐기는 낮잠은 더욱 달콤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낮잠은 자고 나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고 몸의 기운을 앗아가기도 한다. 세네갈 사람들은 보통 그런 낮잠을 자면 "영혼을 빼앗겼다."라고 말하곤 했다. 몇 시간씩 낮잠에 들었다가 늘그막이 눈을 뜨면 그야말로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아무튼 그날 우리는 굉장히 달콤한 낮잠을 잤다. 여행의 피로가 쌓여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럴 때는 영혼을 빼앗기든 말든 상관 말고 잠을 자야 한다.  

 

 그 당시 유럽을 돌며 나와 여자 친구는 [프랑스 가정식]이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보았는데, 20~30분 내외로 굉장히 단순하게 진행되는 귀여운 요리 프로였다. 

 먼저 남자 진행자가 한 명 나오고(유명한 음악가) 그가 자신의 오랜 프랑스 유학 시절을 추억하며 그날의 코스 요리를 소개한다. 

 간단한 전식(엉뜨 레), 본식(쁠라), 그리고 후식(디저트)으로 크게 3번의 흐름을 가져가는 것이 프랑스 요리 코스이다. 남자 진행자는 멋들어지게 갖춰진 아일랜드 식탁 앞에서 말하고 노래하고 재간을 부리며 요리를 한다. 음식이 오븐에서 구워지기를 기다릴 때엔 주방 구석에 가서 피아노를 치기도 한다. 참 재간둥이이다. 

 가정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을 소개해주기 때문에 보다 보면 어떤 요리들은 간단하면서도 그럴듯해 보였다. 우린 그런 요리들을 기억해두었다가 다시 영상을 보며 따라 만들어보곤 했다. 


 그날 우릴 사로잡은 요리는 [꼬꼬뱅]이라고 불리는 와인에 졸인 찜닭 요리였다. 닭으로 요리를 하여 맛없는 음식을 만들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요리를 포기하는 편이 낫다. 나는 요리에 쓰고 남은 와인을 마실 생각에 가슴이 들떴다.

 하얀 메모장에 장을 봐야 할 목록을 적었다. 우리는 진지하게 상의하며 삐뚤삐뚤 [생닭, 레드 와인, 당근, 감자]등을 적어나갔다. 장 볼 목록만큼 귀여운 메모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삼십 분 가량을 걸어 마을 외곽의 마트에 갔다. 느티나무가 우거진 도로를 걸으며 이탈리아의 운전자들이 능숙하게 자동차를 끌고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키스해주고 싶은 8월 이탈리아의 공기였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지만 이탈리아가 아름다운 이유는 진한 색감에 있다. 나무엔 진하게 초록물이 들었고 하늘은 바다보다 더 파랗게 물들었다. 선명함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흐리멍덩한 눈을 크게 떠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꼬나드라는 이름의 귀여운 마트에서 우리는 씽씽 카트를 끌며 장을 보았다.

 "닭부터 먼저 사야 해!"

 "그래, 닭부터 먼저 사야 해."

 정육 코너에는 닭이 있었다. 껍질도 벗겨지지 않았고 부위 별로 잘라지지도 않은 날것의 생닭. 

 "닭을 해체할 수 있어?"

 "우리에겐 시간이 있어."

 우리는 한 마리 커다란 생닭을 카트에 담았다.

 "닭의 잡내를 없애려면 우유에 몇십 분간 푹 담가놓으면 된다고 어디서 본 적이 있어."

 "우유는 우리가 장 볼 목록에 없었지만, 나머지는 우리가 마시면 되니까 우유를 사자."

 그렇게 우리는 우유를 카트에 담았고, 복도 끝으로 가 싱싱한 당근을 담았다. 작은 비닐봉지에 감자를 담았고, 와인을 골랐다. 그렇게 음료수를 담았고, 아스파라거스를 담았고, 치즈를 담았고, 버섯과 쌀, 그리고 여러 가지를 담았다. 우리가 신중히 작성했던 장 볼 목록은 종이 쓰레기가 되었다. 

 "이렇게나 많이 사게 되다니 말이야."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몇 푼 더 쓴다고 인생은 바뀌지 않아."

 그즈음부터 시작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나는 기분이 내킬 때, 그러니까 무언가 소비에 대한 타당성을 인정하며 담대함을 내보이고 싶을 때 그런 표현을 썼다. [이 돈을 더 쓴다고 인생은 바뀌지 않는다.]

 

 장을 다 보고 나오니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한 손엔 한아름 장을 본 물건들을 담은 봉투를 들고 한 손엔 여자 친구의 손을 잡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절대 청교도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또다시 옥수수밭을 지나게 되었다. 내 키만 한 옥수수풀들이 길가에 널려 있었다. 껍질의 색을 보니 아주 알맞게 잘 익은 튼실한 옥수수들로 잘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마트에 가는 길 위에서 옥수수밭을 지나치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여자 친구가 말했다. 

 "오븐에다가 옥수수를 구워 먹으면 참 맛있겠다."

 "그래? 그것도 그래. 잠깐만 기다려봐!"

 그녀의 말을 듣고 어떤 충동성이 번쩍하고 떠오른 나는 달려가 옥수수 서리를 시작했다. 그녀가 제지할 새도 없이 나는 옥수숫대에 대롱대롱 매달린 옥수수를 잡아챘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단단하게 달려 있었다. 어느새 그녀가 곁에 붙어 말했다. 

 "절도죄로 잡혀가지 않을까?"

 "너 하나, 나 하나, 딱 두 개만 가져가자. 그 정도는 주인도 용서할 거야. 그런데 이거 되게 단단하다."

 서리는 빨리 끝내야만 하는 작업이기에 나는 힘을 꽉 주어 옥수수를 뜯었다. 그건 내가 살아오며 뜯은 첫 번째 옥수수였는데, 마음이 너무 급했는지 아니면 요령이 없었는지 나는 단단한 옥수숫대에 손을 깊게 베였다. 아주 깊은 생채기가 나서 옥수수가 빨갛게 물들었다. 

 "아! 어떡해!"

 여자 친구가 소리쳤다.

 나는 남자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연신 괜찮다고 말하며 기어코 옥수수를 하나 더 따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그녀는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차라리 내가 다쳐서 다행이지."

 나는 말했다. 

 그녀는 이미 옥수수 따위는 먹고 싶지도 않다며, 괜히 자신이 옥수수 얘기를 꺼냈다며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다. 

  

 집으로 돌아와 장 본 것들을 주방에 늘어놓았다. 소독이랍시고 와인으로 소독을 하고, 지혈이랍시고 그녀의 화장솜으로 꾹 누르며 지혈을 했다. 

 "나 때문에 오빠 손이 다쳤으니까 내가 모든 요리를 할게."

 깊게 베인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은 채로 앉아, 곁에서 여자 친구가 식칼을 들고 난생처음으로 생닭을 잘라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인생이 영원히 이렇게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여기서 인생을 끝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익다 못해 푹 고아진 꼬꼬뱅

 옥수수는 너무 타서 더 씹어 먹다 보면 이가 다 나갈 것 같았다. 꼬꼬뱅은 와인에 너무 졸였는지 아니면 와인이 싸구려라서 그랬는지, 그것도 아니면 무언가 요리에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는지 굉장히 쓴맛이 났다. 이로 뜯기도 전에 살이 다 발라졌던 상태로 보아선 과하게 익힌 것 같다. 

 그런들 어찌하고 이런들 어쨌겠는가. 지금 생각해도 그날 나는 그녀를 위해 옥수수 서리를 하다가 손가락을 잃었대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 여행기[피렌체편] 그 여름 내 옆에 네가 있었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