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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순 Aug 18. 2020

그런 시답잖은 농담

티베트

  돌아보면 낯이 뜨거워지는, 왜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했을까 싶은 순간이 있다. 겨울의 티베트, 라사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나도 일본어를 할 줄 안다며

"바께스니 닥꽝오 입빠이 쿠다사이"

했을 때 멋쩍게 웃던 그녀의 표정은 아직도 기억이 날 듯하다. 내가 '닥꽝'이라 했을 때 처음에 그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한참 있더니

"아, 다쿠앙"하고 내 발음의 잘못을 되짚어 주었다.


  사실 이 문장은 한국인들에게나 조금 우스운 것이다. 아니 한국인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여전히 쓰이고 있는 일본어 단어로 엮은 일본어 문장. '들통에 단무지를 가득 주세요'라니.


  내가 머물던 숙소는 라사의 스노우랜드 호텔 낡은 도미토리였다. 방에는 여섯 개의 널찍한 침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에서 온 남자 둘과 캐나다에서 온 야크(본명은 '폴'인데 여기서는 야크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나와 그녀가 그 방에 묵고 있었다. 마침 내 침대 바로 옆이 그녀의 침대였다.


스노우랜드 호텔 도미토리


  치나츠 카나에다. Chinatsu Kanaeda.

  그녀는 "金枝玉葉"이라고 쓴 손바닥보다 작은 쪽지를 내게 건네었다.  


  독일 친구들과 캐나다의 폴, 나와 그녀 모두 20대 중후반의 그만그만한 친구들이었다. 낯선 젊은 남녀들이 모이면 묘한 탐색전과 신경전이 일기 마련. 방에는 여자라곤 그녀 한 명뿐이었으므로 며칠 머무는 사이, 초반 한동안은 그곳에서도 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특히 캐나다 친구는 대놓고 그녀에게 치근덕거렸지만 그녀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사이 나와 폴, 독일 친구들은 남쵸 호수나 포탈라궁을 함께 돌아다녔지만 그녀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냈다.


포탈라궁에 함께 다녀온 친구들. 중간의 긴머리가 야크다.


  사흘째 되는 날이었던가, 캐나다 야크가 내게 이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난 포기. 잘해봐."

  내심 그녀가 궁금했던 게 사실이었지만 나는 일부러라도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던 차였다.


순례 중인 티베트인 가족. 다 살아있는 표정.


  도쿄에서 온 그녀는 세 달째 라사에 머물면서 사진을 찍고 있다고 했다. 첫 해외여행의 목적지이면서도 고작해야 열흘 정도의 일정을 티베트에 할애했던 나에게는 꿈만 같이 부러운 이야기였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단발을 하고, 크고 깊은 눈을 가진 그녀는, 같은 방 남자들이 서로 환심을 사려 애쓸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녀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야크'처럼(Yak는 티베트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를 닮은 가축이다. 젖을 짜서 마시고 그 젖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기도 하며 그걸 발효시켜 술을 만들기도 하고 야크 배설물은 말려 연료로 사용하는 등 티베트 사람들에게 참 중요한 가축이다. 폴은 유독 그 야크 차 냄새를 싫어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역겨워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야크'라는 발음은 캐나다에서는 '우웩'이라는 뜻이라 했다. 참고로 '우웩'은 yuck다. 나처럼 어린 녀석이었다) 대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라사 세라사원의 승려


  아무튼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아무래도 같은 방에는 동양인이 나와 그녀뿐이었기에 우리는 왠지 모를 친밀감을, 적어도 나는 그런 느낌을 갖고 있었다. 인사치레로 했던 말인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맛있는 뉴로우몐(牛肉面, 소고기 국수) 집을 알고 있으니 언제 식사를 같이하자고 했다.


  그러다가 정말 넷째 날인가, 그녀가 저녁을 같이 먹자 하였다. 그녀가 데리고 간 국숫집은 작고 어둡고 허름한 곳이었다. 웬만한 여행자라면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 그녀 말대로 그곳 국수는 싸고 맛이 있었다.

  국수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몇 마디 나누다가 그 시답잖은 농담을 건넨 것이다.


  "나도 일본어 좀 할 줄 아는데 한번 들어볼래? 바께스니 닥꽝오 입빠이 쿠다사이."


  그 농담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말을 안 했다고 해서 그녀와의 관계가 더 진전되었다거나 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시답잖은 인간으로 기억된 채 어느새 잊혀지지는 않았을지 모르는 것이다. 실은 그때만이 아니다. 꼭 치나츠처럼 아름다운 여성 앞에서뿐만도 아니다. 괜히 하지 않아도 되는 시답잖은 말을 하고는 두고두고 시답잖음을 되뇌고 있는 나는 그런 시답잖은 인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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