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로가 기생충
무심코 EBS채널로 들어섰다. 그런데 희한한 화면이 펼쳐지고 있다. 사마귀가 물속으로 들어가 자살을 하고 있다. 어안이 벙벙해져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사마귀 몸에서 검정 실 같은 게 풀려나온다. 끝도 없이 이어져 나오는 이것은 바로 이 곤충을 숙주로 하는 기생충, 연가시라고 한다. 이게 사마귀의 어떤 신경전달 물질을 촉진하여 물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데 이 기생충은 사마귀의 몸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물에서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장구벌레가 이 알을 먹고 성장하여 모기가 되면 이걸 잡아먹는 사마귀가 최종 숙주가 되어 이게 배 속에서 한껏 성장한다고 한다. 이어 또 다른 사례가 등장한다.
다리가 기형인 개구리들이 여럿 보이는데 이것은 기생충이 들어 있는 달팽이를 잡아먹은 탓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달팽이에게 있던 기생충이 개구리에게 옮겨가 그 다리를 기형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행동을 굼뜨게 만들어 새에게 잡혀먹도록 하기 위한 것이란다. 그리하여 최종 숙주인 새의 몸으로 옮겨간다. 이 외에도 게의 행동을 느릿하게 만들어 새에게 잡아먹히게 만듦으로써 다음 숙주인 새의 내장으로 옮겨 가는 구두충을 비롯해 게의 호르몬을 변화시켜 수컷을 암컷으로 만들어 놓는 기생충 등 숙주를 통해서만 살아가는 생물의 세계가 놀랍기만 하다.
기생 방법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떤 말벌은 다른 애벌레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주입하여 애벌레의 면역계가 작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가 하면 브루스 파동편모충이라고 하는 건 이 옷 저 옷을 갈아입으며 면역세포들의 추격을 따돌린다고 한다. 더구나 많은 기생충들은 살아가는 동안 한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이동하며, 대부분의 경우 이동 단계마다 다른 모습을 취한다고 하니 정말로 신묘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프로그램이 사라진 다음 당혹스러워진 머리에 이런저런 생각이 돋아났다. 그 하나는 기생충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다른 생물의 몸에 붙어서 그 양분을 섭취하며 사는 동물을 지칭하나 ‘생물의 몸에 붙어 영양분을 섭취하며 살아가는 생물’이 동물만이 아니므로 지상의 모든 생물은 넓은 의미에서 서로가 기생충이다. 모든 생물이 상호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특히 지상 최대의 기생충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잡식 동물일 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것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처럼 낭비 문화가 극성한 세상에서 이를 위해 소진되고 있는 자연재를 생각해보면 지구의 입장에서 인간은 기생충 이상의 암적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 한 가지는 우리 인간의 자율성의 문제다. 사마귀의 몸에 깃드는 연가시나 이것의 알을 먹는 모기의 유충이나, 이것들은 그저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을 따름이다. 연가시가 사마귀를 물속에 빠져 죽게 만들겠다는 생각이나 의지를 가진 것도 아니요 장구벌레가 사마귀에게 연가시를 옮겨 놓겠다고 무슨 짓을 벌인 것도 아니다. 이는 그저 자연의 정교한 장치로서 기생충이든 숙주든 생명 순환에 하나의 배역을 따르고 있음이다. 생물을 비롯하여 지상 만물은 자신의 뜻이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우리 모르는 어떤 명령과 법칙을 따라 움직인다.
우리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조직이라는 것도 근본적으로 개미나 벌의 그것과 다름없으며 권력 지향도 집단생활을 하는 물개나 원숭이의 그것과 별 차이가 있는 게 아니다. 갖가지 사기 행각으로 멀쩡한 이를 도탄으로 몰아넣는 사기꾼도 연가시처럼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평생을 인간 기생충으로 살다 갈 뿐이다. 이들에겐 사이코 패스처럼 죄의식이 없다.
그런데 이 같은 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평범한 우리들 또한 저 나름의 성격과 기질이나 습관 등을 통해 한 가지씩의 모양과 빛깔을 드러낸 후 사라진다. 우리는 자신이 자신만의 일정한 패턴을 따라 살다 간다는 사실을 백안시하여, 자신이 어떤 의지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특정한 레일 속을 굴러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의지의 맹목성과 맹목적 의지의 굴레 속에 있으면서도 이를 자유 의지로 알고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음악과 철학을 만들어내고 천체 망원경을 발명해 우주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으며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를 상세히 밝혀내게 되었으니, 우리 인간은 얼마나 기이한 존재인가. 땅에 발을 붙이고 있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우리 이중성에 대한 파스칼의 다음과 같은 말은 통렬하기만 하다.
“인간이란 얼마나 해괴하고 얼마나 진기한가! 얼마나 괴물 같고 얼마나 혼돈스러우며 얼마나 모순되고 얼마나 신통한가! 만물의 심판자이자 지상의 힘없는 벌레, 진리의 관리자이자 불확실한 오류의 무더기,
우주의 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