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삶의 비율 이대일 Oct 04. 2020

사전에 묻혀 있는 순 우리말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아리잠직하다 : 키가 작고 몸가짐이 얌전하고 앳되 보임

걀쯤하다 : 상당히 갸름한 모습

산드러지다 : 맵시 있고 경쾌한 태도

차랑하다 : 물건이 땅에 닿을 듯 축 늘어져 있는 상태




 

 지방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우리 학교 졸업생의 자그마한 농장 집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가로운 지방도로에서 훌쩍 질러 들어온 곳이어서 차량은커녕 지나는 사람조차 없는 곳이다.


더구나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은 동네도 아니어서 근처에 이웃이 한 집 있을 뿐 그야말로 조용하고 적막한 곳이다. 더구나 집 앞으로는 섬진강의 상류인 추령천 하나가 훨찐하여 풍치도 그만인데 일체의 번거로움이 없으니 독서와 산보에 꼭 맞춤한 곳이다. 방학이면 내려오라 전화를 주곤 하는 L은 시내의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저녁 때나 들어왔다가 아침엔 나가곤 하니 하루의 고요가 깊고도 맑기만 하다. 더구나 저녁이면 이웃집 임 씨 노인과 더불어 세 사람이 술 한 잔을 나누며 이런저런 얘길 주고받으니 즐겁기 한량없는 일이다.


 그런데 임 씨 이 분! 정말로 대단한 분이다. 이순을 한참 넘긴 연세임에도 힘이 장사여서 종일토록 일을 멈추지 않은뿐더러 수천 평의 밭을 혼자 갈아대는데, 일 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농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감동이 일어 온다. 한 번은 경운기 밭갈이가 끝나가는데 더 이상은 도저히 갈아댈 수 없는 구석진 공간이 얌체처럼 반히 나선다. 오래도록 일 솜씨를 구경하며 섰던 내가 이를 어쩔 거냐고 물으니 이건 삽으로 갈아야 한단다. 그러면서 이렇게 쟁기로 갈 수 없는 땅을‘방아리’라고 한다는 말을 덛붙여온다. 


‘방아리? 방아리라니?’


 단어란 모두가 현실적인 필요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지혜를 얻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물이나 현상에 이름을 붙이고 이를 공유한다. 방아리라는 단어가 있었다는 것은 한 뼘 땅이 그만큼이나 소중했으며 대개의 밭에 쟁기가 먹지 않는 부분이 있었음을 뜻한다. 농사짓는 분들이나 알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단어다. 방아 찧듯 해야 하는 땅이라 해서 이런 명칭이 붙었을까? 사전을 찾아보니 나와 있지 않다. 다시금 우리말 갈래 사전을 열어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사투리인 게다. 그러면 어떠하랴. 이름이 독특하고 알맞춤할 따름이다.


 방언이란 특정 공간에서만 자라나는 식물과도 같은 것이다. 언어란 아마도 자연환경의 반영일 게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다른 말로 전라도 방언의 산맥이다. 참으로 독특한 뉘앙스의 씨알 담뿍한 언어들이다. 내친김에 밭에 관계된 우리말을 이어 보면, 며칠에 걸쳐 갈아야 할 만큼 큰 밭을 이르는 말이‘밭 날갈이’ 요. 밭을 맬 때에 크게 뒤집어엎는 흙덩이가‘벼락 덩이’며 채소 농사를 직업으로 하는 이를‘밭장이’라 하고 곡식의 이삭을 발로 밟아 알을 털어내는 일을‘발바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계 농사로 대체된 오늘날엔 이 모두가 의미 없는 단어가 되고 말았다. 요즘 누가 발바심을 하는가. 이래서 용도 잃은 언어는 사망선고를 받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죽은 단어가 어디 이뿐일까. 


할미새는 옛말로‘아리새’였다고 하며 귀뚜라미는‘귀돌아미’그리고 암컷 노루나 사슴은‘느렁이’그리고 참개구리는 요란스레 잘 운다 하여‘악머구리’라 칭했다는데 모두가 낯 선 이름이다. 특히 뻐꾹새는 포곡새라 했다는데 베를 지칭하는 ‘포’자에 곡식‘곡’자로서 조선시대의 현금이었던 이것을 뻐꾸기 울음소리로 읽어낸 걸 보면 민중의 고난이 어림되어온다. 이와는 달리 맷돌의 손잡이를 이르는‘어처구니’나 무덤으로 물이 흘러드는 걸 막기 위해 경사면의 뒤쪽으로 나지막히 쌓은 흙담을 가리키는‘핑계’, 혹은 짚으로 만든 작은 섬(그릇)을 이르는‘오쟁이’같은 단어는 본래의 뜻을 묻어버린 채 여지껏 살아남아 있다.


 오쟁이라는 말이 나왔으니‘오지랖’으로 가보자. 이는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이르는 말로 이는 본래 이러저러한 일에 주제넘게 참견하거나 아무 데고 나서는 이를 이르는 부정적인 의미의 명사다. 그러나 오늘날엔 대인관계가 넓고 사교성이 좋으며 덕성스런 이를 가리켜 오지랖이 넓다고 하는 듯하다. 뜻을 바꾸어 살아남은 단어의 한 예다. 


 그런가 하면 멀쩡히 아름다운 말임에도 사어 신세가 돼버린 것들도 많다. 가령 어린애나 아랫사람을 사랑하여 보살펴 주는 걸‘넨다하다’라 하고 마음에 꼭 들도록 귀여운 걸‘사랑옵다’라고 한다. 또 사람의 생김생김이 깨끗하고 단정한 걸‘개자하다’고 하며 얼굴은 파리 하나 체질이 단단하고 기상 있게 보이는 걸‘갈걍 하다’고 한다.


 형용사의 세계는 또 얼마나 다양하고 화려한가. 한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여기에서의 우리말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지금의 우리네 언어가 얼마나 가난해졌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가령, 그래도 우리 귀에 한두 번은 스쳐 지났을 법한 단어를 골라보면 ‘아리잠직하다’는 키가 작고 몸가짐이 얌전하고 앳되 보임을 이르는 말이며 ‘걀쯤하다’는 상당히 갸름한 모습을 이르고, 그런가 하면 갸름하고 살이 적은 얼굴을 일러 ‘초강초강하다’라고 한다. 또한 맵시 있고 경쾌한 태도를‘산드러지다’라고 하며 드리운 물건이 땀에 닿을 듯 축 늘어져 있는 상태를‘차랑하다’라고 한다. 이렇게 거의 죽어버렸다고 생각되는 순 한글 우리말은 동사나 부사를 비롯해 날씨나 색채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가령‘눌면하다’는 보기 좋을 만큼 약간 누르다라는 뜻이요.‘뇌랗다’는 생기 없이 몹시 노랗다는 뜻이다. 게다가 빨간색 계통의 색 이름은‘빨그스럼하다’나‘발그족족하다’를 비롯해 쉰다섯 가지나 된다. 구름의 명칭만 해도 ‘눈구름’‘열구름’‘털층 구름’등 스무 가지가 넘는다. 바람을 이르는 말은 그 얼마나 많고 비나 계절을 이르는 명칭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내가 우리말에서 무엇보다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단어와 그 단어가 이르는 물체나  현상 간의 유사성이다. 일례로 미꾸라지라는 단어는 미꾸라지라 칭하는 민물고기와 그 느낌이 완전히 일치되어 보인다. 이 단어는 물고기 미꾸라지에 대한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이해 속에서 빚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말로는 더 이상의 다른 단어가 없어 보인다. 더구나 이것의 준말 미꾸리는 더더욱 실물에 가까워 보인다. 물가 습지에 사는 ‘왕미 꾸리광이’라는 외떡잎식물도 마찬가진데 이것 또한 손으로 쥐려 하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제 이름에 상당히 근사해 보인다. 그러니까 이는‘미끄럽다’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을 터인데 ‘미끄러지다’ 거나 ‘미끈거리다’,‘미끈둥하다’를 비롯해 ‘미끈하다’에 이르기까지, 마찰 없이 빠져나가는 상태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미꾸라지를 영어로는 mudfish라 하는데 말 그대로 진흙 속의 물고기다. 우리말이 감각적이라면 영어는 객관적이다. 우리는 느낌을 중시하고 영어는 상태를 중시한다. 그런데 미끄러지다에 이르면 영어도 slip이나 glide로서 우리말과 비슷한 뉘앙스를 띄게 된다. 재미있는 건 바로 이 대목인데 특정 상태를 모음과 자음으로 적절히 구성하여, 성음으로 대상과 정확히 일치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게 어디 미꾸라지뿐일까. 대개의 단어들이 모두 그러하여 가령‘끈적끈적’이란 단어는 끈적끈적한 실제의 상태 이상으로 현실감을 주고 있다.‘새콤달콤’이라거나 ‘올망졸망’이라는 부사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또한‘나타내다’라는 동사는 옛말‘나토다’가 훨씬 그것다워 보인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 뜻을 잘 모르는 단어조차  뉘앙스만을 통해 그 내용을 어림해볼 수 있을 정도인데‘글겅이’라거나‘허들지다’같은 단어가 그것이다. 전자는 마소의 털을 긁는 쇠빗이요 후자는 탐스럽다는 말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말처럼 우리 인간은 언어의 존재다. 언어 없이 생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화는 언어의 산물이요 문명도 마찬가지다. 또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 내주는 것도 언어다.


 도처에서 영자와 영어가 횡행하고 있는 오늘날,‘방아리’에서 비롯된 생각 한 줌이다. 다 갈려도 마지막까지 갈리지 말아야 할 우리‘존재의 방아리’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천재적인 언어를 만들어낸 조상을 가진 21세기 우리들 언어의 방아리는?

작가의 이전글 기생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