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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인의 도적 Aug 15. 2022

대통령을 꿈꾼 독재자의 딸

그는 독재자의 딸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통령이었다. 아버지가 대통령일 때 그는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아버지가 대통령에서 내려온 후 본인도 정치에 입문해 국회의원에 여러 번 당선되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대통령을 꿈꿨다. 두 번의 도전 실패 후 세번째엔 상대 후보와 49대 51이라는 박빙의 결과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평가는 공과가 갈린다. 그의 부친은 대통령이 된 후 나라의 치안과 경제를 안정시킨 공이 있다. 국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어렵게 해왔던 반정부 테러단체를 소탕했고, 물가안정과 경제 개혁을 이룬 공이 있다. 그 시대를 겪은 중장년층은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면 그 과정에서 인권을 탄압하고 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았다. 본인과 일가의 축재를 위해 엄청난 이권을 챙기면서 부패했고, 장기 독재를 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닮은꼴 정치판

여기까지 듣고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해도 넣어 두시라. 아마도 틀릴 것이다.

그의 이름은 게이코 후지모리, 그의 아버지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다. 일본인 이민 2세로 페루에서 태어난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1990년 당시 세계적인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원주민 비율이 높음에도 국민의 12%에 불과한 백인들이 정계와 재계를 장악했던 구조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들과 빈민층의 높은 지지를 얻었다. 

후지모리는 취임 후 위에 설명한 것처럼 경제 재건과 치안 안정에 주력했다. 1990년 페루의 인플레이션은 무려 7600%에 달했다. 하지만 적극적인 경제 개혁과 물가 안정 대책으로 1년여 뒤 인플레이션은 139%로 떨어졌고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확대해 빈곤층의 생활 안정에도 기여했다. 다수 국민의 생활을 불안하게 했던 반 정부 무장단체들(빛나는 길, 투팍 아마루 혁명운동 등)을 소탕했다. 그러나 이후 독재정치를 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인권을 탄압하고 장기 집권을 꾀했고, 엄청난 부와 이권사업을 부정하게 축재했다.(너무 익숙해서 하품이 날 지경이다.)

1990년 일본계 페루인으로 페루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반인륜범죄와 부패 혐의로 25년형을 받은 알베르토 후지모리, 그의 딸 게이코 후지모리 (사진출처: 경북일보, AFP)

뇌물 비리의 꼬리가 잡히면서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로 2000년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재판을 피해 일본으로 도주했다(페루와 일본, 이중국적자라고 한다). 2005년 대선 출마를 노리고 칠레에 입국했다가 체포되어 페루로 인계, 재판을 받고 2010년에 반인륜범죄와 부패 혐의로 2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면되어 자유롭게 살고 있다. 

게이코에게 독재자 아버지는 유일한 정치적 배경이면서 적지않은 정치적 부담이었다. 게이코가 대통령이 되려는 이유가 아버지 후지모리를 사면하려는 것 아니냐는 국민의 우려도 높았다. 그는 열일곱 살에 부모의 이혼으로 퍼스트레이디가 되어 공적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 아버지가 체포된 상황에서 치른 의회선거에서 페루 역사상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며 국회에 입성했고, 이후로도 아버지 후지모리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정치력을 키워왔다. 대통령을 꿈꾸며 2011년, 2016년, 2021년 세 차례 대선에 나섰으나 모두 근소한 차로 패했다. 이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지지율이 떨어지면 아버지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하고 대통령이 되어도 사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했다가, 선거가 끝나면 아버지의 사면을 주장하는 식의 행보를 해왔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탄핵됐다던데 

전 페루 대통령(2016-2018)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사진출처:RPP)

2017년 페루에 도착했을 때, 당시 대통령은 'PPK'라는 약칭으로 불리던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였다. 바로 전 해인 2016년, PPK는 게이코에 0.24%포인트라는 근소한 차이로 대통령 결선에서 승리했다. 내가 마주치는 대부분의 페루 사람들이 메스티소(Mestizo)나 인디헤나(Indigena)였던 것과 달리 PPK는 키 큰 백인 남성이었고, 게이코는 일본계 페루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별 공적도 없는 게이코와 그의 당(민중권력당, Fuerza Popular)이 여전히 페루에서 인기가 높은 것은 그 아버지인 후지모리 시대에 향수를 가진 중장년층이 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줬다. 내가 주로 만나는 젊은이들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거나 집권 정당들에 부정적인 편이었다.

대통령 PPK는 2018년 뇌물 스캔들에 휘말린다. 이 일로 탄핵될 위기에 몰렸는데 갑자기 판이 바뀐 듯 탄핵이 부결됐고, 바로 PPK는 알베르토 후지모리를 사면했다. 후지모리가 25년형을 받고도 지금 자유롭게 살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너무 티나게 탄핵 부결과 사면을 거래한 결과 역풍을 맞았다. 시민들의 반감과 학생들의 시위가 거셌다. 대사관에서는 시내에 나가지 말라는 주의를 계속해서 올렸다. 당시는 한국에서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된 사건이 세계적으로 큰 뉴스였기 때문에 페루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래서 PPK도 탄핵 정국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결국 PPK는 탄핵 재표결 하루 전에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 페루에선 이런 경우 한국과 달리 부통령이 남은 임기를 수행한다. 


남미의 대형 스캔들, 오데브레시 뇌물 스캔들

남미 각국에 뇌물 스캔들로 얽혀있는 브라질 건설사 오데브레시(사진출처:AFP=뉴스1)

PPK가 연루되었던 뇌물 스캔들은 브라질의 대형 건설사 오데브레시 컨소시엄으로부터 쿠친스키 대통령 자신이 운영하는 컨설팅 업체를 통해 거액의 자문 수수료를 받는 등 2004년부터 2013년까지 500만 달러(약 54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건이었다. 오데브레시에서 뇌물을 받은 것은 PPK 하나만은 아니었다. 

페루 검찰 수사 결과 오데브레시는 2004년 이후 최대 2900만 달러(약 341억원)에 이르는 뇌물을 페루 정부 당국자들에게 제공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PPK를 비롯해 오얀타 우말라, 알레한드로 톨레도 등 3명의 전직 대통령이 연루되었고, 알란 가르시아 전 대통령은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 자살했다. 게이코 후지모리 역시 2011년 대선 당시 오데브레시에서 120만 달러의 불법 선거자금을 받은 혐의로 2018년부터 수사를 받아왔다.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며 진행된 2년여에 걸친 수사 끝에 2021년초 검찰은 대통령 후보였던 게이코와 그의 측근 41명을 기소했다. 게이코는 급해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면책특권을 행사하지 못하면 30년 10개월의 구형을 예고한 검찰과 법원에서 다퉈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거일엔 주류 판매 금지, 페루의 선거 문화

흔히 남미의 정치라고 하면 극심한 포퓰리즘과 과격한 시위를 떠올린다. 페루에 잠시 있으면서 본 바로는, 그런 면도 있긴 하지만 더 강하게 느껴진 건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였다. 다른 나라 어디나 그렇듯 젊은 층이 특히 그래 보였다. 정국은 풀기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고 선거는 폭탄 피하기 게임이 되도록 만드는 방법으로는 무관심이 최고다.  

페루에서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다. 출마한 정당과 후보자 수가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60-70명은 되어 보이는 후보들은 본인의 이름보다 투표지에 찍어야 할 번호를 홍보하기에 급급했다. 도로변에 번호를 크게 써넣은 거대한 입간판이 줄지어 섰다. 후보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재미있었던 건, 선거 전날부터 선거일 오후까지 모든 상점에서 주류 판매가 금지된다는 점이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마트에 가보니 정말 주류 코너에 불이 꺼져 있고 선거로 인해 판매를 중지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그렇다고 페루 사람들이 한국인처럼 술을 많이, 자주, 거나하게 마시는 문화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피에스타나 특별한 행사 때 약간씩 마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도, 마치 술로 인해 판단이 흐려질 것을 염려라도 하듯이 주류 판매를 금지하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이건 페루가 '의무투표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다. 페루에서는 특별한 이유 없이 투표에 불참하면 불이익이 따른다. 


권력이냐 감옥이냐

2021년 코로나 정국에서 치러진 페루 대선의 유력 후보는 두 명이었다. 

게이코 후지모리와 페드로 카스티요. 보수당 후보인 게이코와 달리 급진 좌파 성향 페루자유당(Peru Libre) 후보로 출마한 카스티요는 주요 산업 국유화와 개헌 등 급진적인 정책 공약을 내세웠다. 정치 신인이랄 수 있는 카스티요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교원노조 장기 파업을 이끌면서 알려졌는데, 그간 정부 정책에서 소외되어 온 지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극단적인 두 후보의 경력과 공약으로 인해 '최악을 피해야하는' 최악의 선거라는 평을 받았다. 게이코가 되면 부패와 부정이 더 날개를 달고 나라를 망치게 될 거라는 한탄이, 카스티요가 되면 경험없는 급진성으로 베네수엘라와 같은 망국의 길을 가게 될 거라는 우려가 국민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하는 듯했다. 

2021 페루 대선의 두 유력 후보였던 페드로 카스티요와 게이코 후지모리

그러나, 진짜 최악의 상황은 선거 후에 벌어졌다. 4월 11일 투표가 끝나고 무려 한 달 반이 지나도록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당선자를 확정하지 못했다. 카스티요가 근소한 차로 이겼다는 결과를 게이코 측이 받아들이지 않고, 양측 지지층의 시위가 격렬해지는 상황에서 선관위가 발표를 하지 않음으로써 정국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게이코 측에서는 권력을 쥐지 못하면 감옥에 가야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부와 권력 요직이 보수당의 손아귀에 있다 해도 선거 결과를 틀어쥐고 한 달 반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 먼 곳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페루는 팬데믹 상황을 관리해야 할 리더십이 간절한 상황이었다. 보통 1% 안팎의 치명률을 보이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당시 페루의 코로나 치명률은 10%에 달했다. 2020년에 페루를 빠져나오지 못했다면 얼마나 불안에 떨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 수치다. 긴 혼란 끝에 2021년 7월 19일 카스티요의 대통령 당선이 공식 발표되었고, 게이코는 검찰에 체포되었다. 


카스티요 정부가 페루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른다. 실제로 취임 후 인사, 정책, 정치력에서 오락가락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 두 번이나 탄핵 표결이 벌어지기도 한 걸 보면 좋은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페루에 무심하지 못한 1인으로서, 국민들이 자신의 운명을 몇몇 정치인의 손에 맡겨버리지 않고 스스로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길 바랄 뿐이다. 세계 어디서나 닮은꼴은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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