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지셔닝. 마케팅 강의를 몇 번이라도 들어본 경험이 있다면 익숙할 용어다. 포지셔닝은 생겨난 지 40년 가까이 된 고전 마케팅 용어로, 잠재 고객의 마인드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조작하고 연결해서 상품의 위치를 잡아주는 것을 말한다. 즉 고객들의 마인드에 존재하는 다양한 연상들을 활용하는 것이고, 기존의 연상을 뒤엎어버리려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는 많은 기업들이 마케팅을 시도할 때 실패하는 원인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고객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확립된 생각들을 자꾸 전복시키려 드는 것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책에서는 사람의 마인드에 여러 사다리가 있다고 설명한다. 상품의 영역별로 브랜드의 순위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콜라라는 상품군(사다리)이 있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사다리의 첫 칸부터 코카콜라, 펩시, 그 외라는 순위를 매긴다.
그리고 이렇게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매겨진 순위는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펩시가 코카콜라를 압도하고 1위로 포지셔닝하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치더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지도라는 측면에서) 업계 리더의 위치라는 것은 광고 수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더불어 여기서 설명하는 업계 리더 기업들은, 책에 따르면 해당 상품 영역의 선구자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코카콜라는 콜라라는 상품군에서, IBM은 컴퓨터라는 상품군에서 소비자들에게 선구적이었다. 물론 이들이 정말로 해당 상품군의 첫번째는 아닌 때도 많지만 (IBM은 최초의 컴퓨터가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 또 하나의 사다리를 만들어준 기업들이다.
그렇다면 선구자가 아닌 기업들, 첫번째가 아닌 기업들은 어떡할까? 그저 손 놓고 당할 수만은 없다.
책에서는 에이비스와 세븐업의 사례를 들며 이들이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 어떻게 포지셔닝했는지 설명한다.
1. 에이비스
에이비스는 허츠 다음 가는 렌터카 업계의 2위 브랜드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2위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갔다. 자신들은 렌터카에서 2위지만, 고객들이 우리를 이용하는 건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카피였다. 즉 허츠의 1위 자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들의 차별점을 어필하는 방식이다.
기존에 소비자들의 인식 속에 공고한 순위 자체를 뒤바꾸려 하지 않고 다만 '열심히 한다'라는 진정성으로 연결고리를 만들어 줬다고 말할 수 있겠다.
2. 세븐업
세븐업은 '콜라가 아닙니다(Non Cola Campaign)'라는 메시지로 유명하다. 콜라라는 사다리 안에 갇힌 순위경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다리를 구축하고자 한 이 방법은 유효했다. 이들의 전략은 후에 코카콜라가 스프라이트를 출시하고 나서도 한동안 따라잡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 지점이 있다. 오늘날의 상품들은 포지셔닝 이론이 등장했던 198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이다. 가령 콜라를 예로 들면, 과연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는 콜라라는 사다리가 존재하며 그 속에서 순위를 매기고 있을까?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븐업과 관련된 그들의 마음 속에는 음료수 전체의 순위, 혹은 탄산음료의 순위, 그것도 아니면 군것질거리 전체의 순위나 심지어는 '몸을 시원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행동들'의 순위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세븐업은 더이상 비콜라(Non-Cola) 제품군에서 1~2위를 점하고 있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더위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세븐업이 빠르게 떠오를 수 있게 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책에서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예견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책을 교정하던 당시(2000년대)에 덧붙인 저자의 코멘트를 보면, 세븐업이 결국 스프라이트에 밀린 이유로 '콜라가 아님을 알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래서 세븐업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존재하는 복잡한 심리를 꿰뚫는 통찰은 보이지 않아 아쉽다.
사람들의 마음 속이라는 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앉혀 놓고 브랜드 연상 테스트를 아무리 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 이상의 답변을 할 수는 없다. 이제는 사람들의 'Unmet Needs'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Wants'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득세한다. 그건 상품이 이미 시장에 너무 많고 소비자들도 본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원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CJ ENM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들은 방송, 음악 산업의 영향으로 2~30대의 젊은 층에게 어필하는 트렌디한 콘텐츠 플랫폼으로 포지셔닝되어 있다. '콘텐츠 괴물'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사실상 국내에서 CJ ENM을 따라올 기업은 없다. 콘텐츠 업계 리더라도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아쉬움이 있다. 콘텐츠 업계 리더는 맞지만, 세부적으로 콘텐츠를 살펴보면 그들이 소비자들에게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그렇게 안정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영화 사업의 경우 더 이상은 매출의 견인고가 아니라 드라마 사업에 밀려 계속된 하락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이들에게는 방송 사업이라는 강한 무기가 존재한다. 이 분야에서 CJ ENM의 월등함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방송 시장 자체는 어떠한가? TV 광고는 2017년을 기점으로 이미 디지털 광고에 추격당했고, 10대들은 점점 더 TV를 보지 않고 짧은 영상 클립을 소비하는 시대로 진입했다. 넷플릭스의 위협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고 유통하는 능력 자체만으로 미래의 안정성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넷플릭스와 방송 클립 콘텐츠의 추격이 상생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OTT 기업들에게 콘텐츠를 제공하고, 클립 광고를 넣고, 자체 플랫폼인 Tving에서는 고객 유입을 위해 타 방송사의 콘텐츠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더 핵심적인 대안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구독자들의 데이터를 무시무시하게 활용하고 있는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에게 언제까지 비길 수 있을까.
어쩌면 똑같이 시청자 데이터를 활용하더라도, 그 모습을 일정 부분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에 직접 참여시키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콘텐츠를 침투시키고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CJ의 목표라면 그들에게 단순히 콘텐츠를 전시하는 것만으로는 팬을 얻기 어렵다. 그들에게 나도 CJ의 콘텐츠 제작에 작게나마 영향력을 주고, 피드백을 제공하면서 함께 콘텐츠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자부심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에게는 그들의 행보를 지지하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가? 현재로서는 개별 콘텐츠의 팬이 존재할 뿐이다. 이는 소비자들에게 '내 것'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런 경험적인 측면을 강화한다면 CJ ENM은 정말 뜻대로 '문화 콘텐츠 공룡'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