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를 그려낸다는 것에 대해
올해는 보러 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 전시가 참 많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특히나 한참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행되던 3~4월에는 밖에 나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니, 전시회에 가는 일 역시 꺼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로 포기한 전시회 중 하나가 바로 〈툴루즈 로트렉 展〉이다. 광고를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특히 그의 작품세계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술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다. 각 시대별 미술사조 역시 헷갈리는 경우가 다반사고, 그림이 주는 즉각적인 인상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시간과 돈을 마련해 찾아갔던 전시는 앤디 워홀, 키스 헤링, 앨런 플레처와 같은 아티스트의 회고전이 대부분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순수예술보다 상업예술에 속한다고 분류할 수 있을 사람들이다.
툴루즈 로트렉은 그런 아티스트들의 선조격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상주의 미술이 주축을 이루던 벨 에포크 시대, 즉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이 바로 로트렉의 무대였다. 그러나 로트렉은 인상주의 화가가 아니다. 사실 그의 미술세계는 비록 여러 방면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 독창적인 것이었다.
어떤 유파에 속했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이런 애매모호함은 오히려 그렇기에 분명히 개성적으로 보인다.
전시는 크게 7개의 섹션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는 로트렉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는 7가지의 키워드(연필 드로잉, 뮤즈, 몽마르트 카페, 여자, 잡지와 출판, 말과 승마, 포스터)를 테마로 나눈 것이다.
로트렉의 생애가 짧았던 만큼 굵직한 변곡점 역시 그다지 없었던 걸 고려하면 현명한 기획이다. 조금 아쉬웠던 점이라면 각 테마가 명확히 분리되는 주제가 아닌 만큼 앞서 감상했던 작품을 여러 번 중복해서 봐야 했다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감상자들은 섹션별로 왜 이 작품이 다시 한번 등장해야만 했는지를 이해하려는 노력하며 전시를 따라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첫 섹션이 등장하기 전에는 로트렉의 주요 작품 몇 점이 미디어아트로 전시되어 있다. 나는 미디어아트에 딱히 감흥을 느끼지 않는 편이지만 로트렉이 몽마르트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냈던 것을 고려하니 그의 작품에 제법 어울리는 매체로 느껴졌다. 미디어아트 구간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전시가 시작된다.
첫 번째 섹션에서는 로트렉이 습작처럼 그려낸 연필 드로잉 작품을 모아두었다. 로트렉은 어딜 가도 연필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의 모습을 빠르게 드로잉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드로잉은 일종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게 그의 드로잉은 기획자나 디자이너의 영감 노트 같기도 했고, 작가들이 소재를 기록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다이어리 같기도 했다.
모든 아이데이션에서 기록은 필수이다. 일상 속에서 소재를 발견하고, 그걸 붙잡아 늘어지면서 디벨롭하는 것이 아이디어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들에게도 그와 같은 관찰과 기록이 필수라는 사실을 로트렉의 연필 드로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메모에 정해진 형식이 없듯이 그의 드로잉 역시 체계가 없고 엉성한 면이 있었다. 그런 만큼 대상을 바라보고 느꼈던 로트렉의 순간적인 단상이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는 것 역시 드로잉이었다. 아마 그림의 예술적 완성도와는 무관한 드로잉을 첫 번째 섹션으로 당당히 걸어 둔 기획은 로트렉이 세상을 직관했던 방식을 가장 처음으로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로트렉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겹쳐보이는 게 있다. 바로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의 그림이다. 마치 만화처럼 테두리를 따라 그려진 뚜렷한 검은 선 같은 화법이나 선명하고 예쁜 색감 같은 것이 상당히 비슷하게 느껴진다. 당시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絵)가 유럽에 소개된 이후로 우리가 잘 아는 반 고흐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이런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로트렉이나 무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둘의 작품세계는 매우 다르다. 대표적으로 무하의 그림은 한 눈에 척 보자마자 아름다워 보인다. 아름다운 대상을 그리면서도 한층 더 아름답게 미화한 느낌이다.
반면 로트렉은 추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했다는 평가가 붙는다. 미화보다는 희극적으로 풍자하는 편이고, 그런 만큼 대중적인 인기는 무하에 미치지 못했을 게 뻔해 보인다. 오히려 마니아들이 열렬히 선호했을,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힙’한 화가가 로트렉 쪽이 아니었을까?
그가 생각했던 아름다움이란 현실 그 자체였다. 보이는 대상을 억지로 꾸며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는 것에 몰두했고, 그렇게 그는 카바레의 스타인 제인 아브릴, 이베트 길베르와 같은 인물들을 화폭 위에 새롭게 탄생시켰다.
그러나 다르게 해석하면 로트렉이 인물의 어떤 지점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고 싶어했는지에 대한, 예술가의 주관적인 의도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시선에서 그려낸 뮤즈들은 아름답지만 개성적인 존재였고, 또한 이면에 슬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의 그림은 전부 몽마르트의 생활자들이나 방문객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그가 그렸던 여성들은 아름다운 치장을 하고 누군가를 유혹해야만 하는 모습 대신, 몸과 마음이 지쳐 있고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존재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엘르(Elles).1896〉 연작은 가감없이 그런 현실을 그대로 묘사했고, 이런 표현방식이 당시에는 추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대대로 회화 속 여성의 모습이 극도로 이상화, 대상화되어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만큼 로트렉이 남긴 여성들의 ‘진짜 모습’은 예술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로트렉의 친구 타데 나탕송(Thadée Natanson)이 “그는 남성보다 동물을, 동물보다 여성을 좋아했다”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그는 여성을 주로 그려냈다. 이는 그가 주류 남성 사회에 편입되지 못했던 대신 유곽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생활을 지켜볼 수 있는 권한을 얻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서는 일관되게 관조적이면서 애정어린 시선이 느껴진다.
로트렉의 활동은 잡지, 책, 포스터 등 철저히 상업적인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로트렉어 없었다면 앤디 워홀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 건 그가 기반을 잘 닦아두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는 일생 동안 석판화 작품에 열중했는데, 이런 기법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어떻게 석판으로 저렇게 정교한 그림이 탄생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알고보니 석판화는 상당히 시간과 노력을 많이 요하기는 하지만 정교한 스케치를 충분히 반영할 수 있는 독특한 화법이었다.
이전까지는 귀족이라는 클라이언트와의 1:1 계약으로 이루어지던 작품 제작이 이 시기를 전후해 그 향유 대상을 대중으로 확대했는데, 19세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석판화도 이에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로트렉 역시 석판화를 활용했기에 여러 장의 포스터를 제작하고 대중에게 배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트렉이 작품을 기고했던 잡지 〈르 리르(Le Rire), 비웃음〉는 유명인들과 사회의 이런저런 일들을 풍자하는 잡지였다. 그 역시 풍자적인 그림을 자주 기고하곤 했는데 가만 보면 오늘날의 만평과 비슷하다. 인물의 모습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과장해 그려내고 그 아래에 ‘천박하다’는 류의 촌철살인 캡션을 달아두는 것마저 시사만화의 그것이다. 그의 이런 유머감각 덕분일까, 로트렉의 그림에는 아무리 어두운 현실이 담겨 있어도 마냥 우울하지만은 않다.
로트렉은 인물을 그리는 일을 가장 사랑했지만, 말에 대한 그의 사랑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번 전시 중에서 그림의 기법 자체에 감탄하게 된 섹션이 있다면 여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달려가는 말, 가만히 서 있는 말 등 다양한 각도에서 대상을 지켜보면서 그려낸 말 그림은 정말 생동감이 넘쳤다. 근육에 진 명암의 표현이 굉장히 섬세한 것을 보고, 이건 보통의 관찰력으로는 흉내내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 그림의 대부분이 로트렉의 어린 시절에 그려진 것이라는 걸 떠올리면 어려서부터 그의 재능이 상당했던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평생 말을 타지 못했다. 그런 상실감이 그의 애정에 더욱 불을 지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의 사랑 덕에 멋진 말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전시를 감상하는 내내 가장 일관되게 느낄 수 있었던 로트렉 작품관의 특징은 섬세함과 예리함이었다. 때로는 투박한 선으로 대강 그려놓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기도 하는 중에도 대상을 정확하게 꿰뚫는 예리함이 보였다. 또 어느 부분에서 힘을 주고 빼야 하는지 같은 디테일이 살아 있어 자세히 뜯어볼수록 다르게 보이는 때가 많았다.
그가 대상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고, 또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선천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결국은 그가 길지 않은 삶 동안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고자 했던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림도 글도 사실 완벽한 객관성을 보장할 수는 없는 법이고 자신만의 해석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으로 그린다는 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애쓰겠다는 일종의 다짐에 가까운 것 같다. 로트렉의 그림은 명확하게 자신의 눈에 밟히는 대상의 고통, 그가 그려내는 인물들의 삶의 애환을 숨기거나 가리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름답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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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 로트렉展 - 앵콜전시
- Henri de Toulouse-Lautrec -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층
제1,2전시실
기간
2020년 6월 6일(토) ~ 9월 13일(일)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오전 10시 ~ 오후 7시
(매표 및 입장마감 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일반 : 15,000원
청소년 : 12,000원
어린이 :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