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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고독

<나의 아저씨>와 엮어 보는

by 펑예

이번 주는 선거일에 이어 현충일이 기다리고 있다. 휴무를 목전에 두면 늘 켜놓는 라디오 방송을 비롯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얼굴까지 모두 화기애애. 어두워지는 것은 엄마들 얼굴뿐이다. 특히나 공휴일과 별 상관없이 일하는 자영업자 집안의 엄마는 더 어두워지는데 그게 바로 나다. 얼집은 물론 남편도 없이 단둘이서 긴긴 하루를 헤쳐나가야 한다.


이것도 고독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을까? 요행히 조인하는 동지들이 있을 땐 그렇게 좋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망이한테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혼자 놀면? 재미없고, 둘이 놀면? 쬐금 재밌고, 셋이 놀면? 더 재밌고, 넷이 놀면? 더더 재밌고, 다섯이 놀면? 더더더 재밌고..." 그러면 숫자사랑 고망이는 억 명을 부르기도 하는데 여하튼 한 팀만 조인해도 괜찮은데 넷 팀쯤 조인했더니 확실히 더 즐거웠던 경험이 있다.(고망이보다 내가 더 즐거움;) 그러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든 거다. 휴일을 앞두고 가슴에 한기가 들고 한숨이 지어지는 것은 혼자라서 더 큰 것 아닌가. 마치 야근처럼.


최근에 드라마를 하나 정주행했다. 모두가 극찬하며 강추했던 <나의 아저씨>다. 방영 당시 내가 즐겨하던 SNS가 트위터였는데, 한창 페미니즘적 의식이 자라나 그에 관한 논쟁이 뜨거웠던 시기였고 트위터가 꽤 주요한 장이었던 까닭에 '나의 아저씨'는 어린 여자와 중년의 남자가 나오고 여주가 폭행을 당하는 씬 등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뭔지 하여간 본방은 물론 재방도 볼 생각을 못했고 어느덧 7년이 흘렀다. 그 사이 아이유는 더 대단한 배우가 되었고 이선균은 뜻밖에도 유명을 달리했다.


서론이 되게 길었는데 이 드라마에 대한 각자의 감상이 있겠지만 특히나 내게 강하게 다가온 것은 서두에 꺼낸 '고독함'이었다. 모두가 쓸쓸하고 짠한 인생들인데, 그 쓸쓸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갭'에 의해서인 듯하다. 구체적으론 '내가 바라는 나''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간극에서 오는 것이다. 박동훈은 편견 없이 누군가를 대하고 거짓 없이 정직하며 자기 사람을 어떻게든 지키고 위하려는 따뜻한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평범한 듯하지만 요즘 세상, 이 도시에서 보기 드문 귀한 성품이다.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위선을 떨고 쉽게 상대를 짓밟는 회사 중역으로서의 삶이 쉽지 않다. 그 간극으로 그는 늘 괴롭고 그를 좋아하는 많은 이들 속에서도 곧잘 쓸쓸한 눈빛이 되곤 한다.


그런 그의 속내를 파견직 이지안이 알게 된다. 제대로 된 보호자 없이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오다 전과까지 진 그는 세상이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곳이라고 느끼는 인물이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임원 정치 싸움에 끼어들어 박동훈을 도청하며 나락에 빠뜨리려고 하지만 그가 그저 그런 아저씨가 아닌, 처음 만난 진짜 좋은 어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감동으로 이제는 그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회사 대표에게 배짱 좋게 딜을 하고 도청 같은 범죄까지 감행하는 그는 낼 곧 죽어도 상관없다는 자세로 살아가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사는 법밖에 몰랐던 것 같다.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도와주던 사람들도 네 번 이상 호의가 계속되지 않았고 과거의 이력을 알고서는 모두 떠나갔다. 평범하게 누군가와 교류하며 살고 싶지만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 틈에서 일해야 하는 스스로를 가까스로 껴안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쓸쓸한 사람들은 서로를 지켜주기 위해 애쓰고 응원하고 가장 힘든 순간에는 곁에 있어 준다. 내가 가장 감명받은 장면은 이지안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인데, 어쩌면 홀로 장례식장을 지켜야 했을 그에게 박동훈과 박동훈의 가족들, 가족처럼 가까운 학연 지연으로 구성된 조기축구회까지 함께한다. 게다가 장례식장 복도가 너무 허전하다며 박동훈의 형(한때 대기업 임원이었으나 현재는 빚만 잔뜩 남은 구제불능의 그렇고 그런 아저씨)은 장판에 숨겨 놓은 돈을 몽땅 써서 화환을 마련하는데 본인이 한 일 중 가장 멋있는 일이라며 좋아한다. 이 씬만은 마치 오쿠다 히데오의 단편 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안고 사는 그 고독감으로 낮아진 온도를 다시 높이는 것은 서로에 대한 호의고 정이다. 학연, 지연, 조기축구회, 형제와 가족들, 어쩔 때는 지긋지긋하고 창피한 이름들이지만 그들이 있어서 또 힘을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쓰다 보니 또 과거 공동체 사회는 얼마나 더 살기 좋은 사회였을까 싶어진다. 아이들 소리가 시끄럽다고 민원을 넣는 빡빡한 사회가 아니라 어려움이 있으면 너나없이 손 내밀고 서로 아이를 돌봐주는 분위기가 당연하던 과거는.

마스크까지 쓴 채 서로를 피하는 게 당연한 시대에 태어난 고망이를 키우며 내일의 육아를 걱정하고 다른 아이와 어울리는 법을 돈을 써가며 가르쳐야 하는 입장이라선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내일은 제가 일이 있는데 남편이 쉬어서 남편이 아이들을 보기로 했어요.


어렵게 만난, 자영업하는 집안 엄마에게서 방금 톡이 왔다.

'조~~오켔다'

여러 집들이 어울려 같이 아이들을 놀게 하던 어느 행복한 휴일의 광경을 가슴에 담아둔 채, 혼자 고망이와 보낼 하루를 받아들이며 고독함에 몸을 조금 떤다.

여하튼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받는 이야기, 서로의 속내를 누구보다 깊이 있게 알고 위로해주는 남녀가 굳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엮이지 않는 그 유대가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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