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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넥서스4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읽어 봄

by 펑예

이번엔 제1부의 마지막 챕터 "결정: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읽어보겠습니다.


하라리 선생께서 서두에 딱 얘기하고 시작하신다. 민주주의와 독재(전체주의) 체제에서 정보는 어떻게 다르게 흐르고 기능하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본다고. 그것을 보면 AI도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예견해볼 수 있다네?


정보 네트워크 관점에서 보자면 독재는 강력한 자정 장치가 없는 중앙 집중화된 정보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반면 민주주의는 강력한 자정 장치를 갖춘 분산된 정보 네트워크다. 앞서 나온 챕터들에서 얘기했듯 민주주의에서도 중요한 것이 모든 사람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선거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정부 권력을 행정, 사법, 입법으로 분리함으로써 '강력한 자정 장치'를 둔다. 그리고 이 노드 간의 (서로를 견제하는) 지속적인 대화가 중요하다.


그래서 강압적인 지도자들이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자정 장치를 차례로 공격하는 것이다. 대개 법원과 언론부터 시작한다. 법원의 권한을 박탈하거나 법원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모든 독립적인 언론 매체를 폐쇄한다.(불과 몇 달 전 우리나라 이야기다!) 선거는 오히려 이용한다. 푸틴의 러시아를 보면 선거를 의례적 절차로 남겨두고 정권의 정당성을 얻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외관을 유지하는 데 이용한다. 그리고 선거에 승리한다고 무제한적인 권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들으면 그들은 진심으로 당황한다.


물론 선거, 그러니까 다수의 의견을 통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합당한 조치라 생각되는 민주주의적 장치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과 통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은 종종 실제와 다른 것이 진실이기를 바라고 선거는 오히려 사람들의 상충하는 욕구를 조정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일 뿐이다.


예를 들면 911 테러 직후, 미국에서는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이라크 국민들은 미국이 민주주의로 이끌어주길 바란다는 주장을 국민의 다수가 받아들여 이라크를 침공했다. 하지만 실상 이라크에는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고 이라크 국민 역시 미국인의 손을 빌려 민주주의를 수립할 마음이 없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이후의 여론 조사를 보면 대부분의 미국인이 침공 결정이 재앙적 실수였음을 인정했다.


이처럼 다수의 의견을 듣는 것이 진실을 왜곡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은 위험하다. 그래서 진실을 추구하는 기관들(법원, 학술기관, 언론)의 자정 역할을 지켜주고 이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바로잡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전문 기관들의 역할이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이 다수의 국민들에게 쉽지는 않다. 말하자면 그것은 전문 관료 조직의 일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는 이 점을 공략한다. 즉 대중의 불만을 이용해 민주주의 기관들을 공격하고 자정 장치를 모조리 해체한 후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선관위, 심지어 헌법 재판소를 공격하고 입법 기관을 장악하려 한 그 행태에 대한 해설로 느껴진다. 아마도 작가가 가장 큰 위험 대상으로 보는 것은 미국이었겠지만 어쩌면 동시대 문제라는 생각이 듦)


포퓰리스트의 가장 황당한 주장은 자신들만이 진정으로 국민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이런 신조는 국민이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을 지닌 실존하는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국민의 뜻'이라는 하나의 의사를 지닌 정체불명의 통합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런 종교에 가까운 믿음이 가장 악명 높게 드러난 예가 나치의 슬로건인 "하나의 국민,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다.(김우리 교수 등이 우리나라에 드리운 '파시즘'을 논하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은 '진짜 국민'은 오직 하나의 의사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만이 그 의사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국민의 힘'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독재 정권을 수립하려는 처사다.(고대로 발췌한 것입니다. 이거 혹시 한국판인가요?)


이는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모든 상호작용을 권력투쟁으로 환원하면 현실이 단순해져(각종 사안 마다 종북 몰이, 범죄자 프레임 씌우는) 전쟁, 경제 위기, 환경 등 아무리 복잡한 사건도 쉽게 해석할 수 있고 때때로 맞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은 민주주의가 잘 기능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로 돌아가서,

초점을 선거가 아니라 대화에 맞춰보자. 북한도 선거하고 평양에 있는 만수대 의사당에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687명이 모여 대화를 나눈다. 하지만 실질적 권한 없이 '다른 어딘가에서 내려진' 결정을 승인하는 거수기 역할만 할 뿐이다. 정치국 의원들이 공식 회의에서 감히 김정은의 정책을 비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의 패권을 장악해 온 미국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가능하다. 물론 공개적으로야 정부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요즘은 시위에 군 투입까지 감행하지만;) 하지만 가장 최근에 미국 의회에서 정당끼리 서로 다른 의견을 대화로 설득하는 일이 있었던가? 미국 정치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그런 '대화'가 요즘은 어디서 이루어지는지 모르지만 의회는 확실히 아니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없을 때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을 수 없을 때도 죽는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을,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서로 의견을 듣고 대화하고 협력해 나갈 수 없는 사회라면 언제든 민주주의는 죽을 수도 있는 생명체와 같다는 관점은 새롭게 와닿는다.


여기서부터는 민주주의가 언제부터 태동했고 그것이 지금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등을 훑는다.


민주주의는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생각보다 꽤나 과거로 거슬러 간다.

고고학과 인류학적 증거에 따르면 고대 수렵채집인 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정치체제는 '뜻밖에도' 민주주의였다. 물론 선거나 법원, 언론 같은 기관은 없었지만 정보 네트워크는 분산되어 있었고 스스로 바로 잡을 기회도 충분히 있었다는 의미에서다. 무리는 고작 몇 십이라 어디에 야영장을 만들고 사냥을 할지를 쉽게 공유했고 논쟁했다.

하지만 농업 혁명 이후 특히 '문자의 발명'으로 대규모 관료 조직을 갖춘 정치가 등장하고서는 무리가 커지고 정보는 중앙에 독점되었다. 서기 3세기까지 로마제국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대규모 인간 사회가 자정 장치 없는 중앙 집중화된 정보 네트워크였다. 하지만 주로 정보 기술의 한계 때문에 전체주의가 아닌 전제주의로 기울었다. 중앙이 작은 지역의 살림까지 관리할 도리가 없었기에 지역 사회는 여전히 자율성이 존재했다.


그러다 19세기 산업 경제가 부상하면서 정부는 훨씬 많은 행정 관료를 고용할 수 있었고 전신, 라디오 같은 새로운 정보 기술 덕분에 이 모든 관료를 빠르게 연결하고 감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대규모의 민주주의뿐 아니라 '전체주의'를 가능케 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여러 자정 장치를 개선하고 있을 때 소련 전체주의는 3중 자기 감시와 자기 테러 장치를 가다듬고 있었다.


이후 책은 스탈린 시대의 소련을 다루면서 21세기의 기술이 어떻게 모든 국민을 통제하며 인권을 무너뜨려 가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마녀 사냥 등의 재앙과 닮아 있다. 그 시대 소련은 끊임없는 가짜뉴스와 음모론 공세로 사람들을 통제해 (심지어 모든 사람이 매일 매 순간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 통제하려는) 자신들의 질서를 유지했고 소련의 농업 집단화는 대규모 노예화와 기아를 초래했지만 대신 소련이 빠르게 산업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렇게 강대국이 된 소련. 1940~50년대 초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스탈린주의가 미래의 대세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주요 예술가와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지지를 얻었다. 어찌 보면 스탈린주의는 세계 지배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특유의 폐쇄성으로 인해 폭발적으로 많아지는 정보를 권력자들은 다룰 능력이 없었고 그 부하들은 뭔가를 주도적으로 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시스템 전체가 경화되어 붕괴하고 말았다.

스탈린주의 대표 음모론 중 하나인 '의사들의 음모'. 그러니까 소련 의사들의 상당수가 유대인이었고 그들이 소련 지도자를 살해하고 병원의 아기들까지 죽이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의사들을 못 믿을 집단으로 만든 바 있다. 그런데 그 음모에 대한 집단 히스테리가 극에 달할 당시 스탈린은 뇌졸중을 일으켜 쓰러졌으나 그 부하들은 그 음모론의 영향으로 의사를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 마지막이 뭔가 자승자박, 인과응보다.


여하튼 전체주의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모든 데이터를 하나의 중앙 허브에서 집중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 극도로 비효율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알아서 필패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일들이 인과응보 대로 흐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2020년대 민주주의는 다시 한번 정보 혁명으로 중요한 시험대에 올라섰다. 인터넷에 연결된 누구라도 발언권이 주어진 상황(물론 인간이 아닌 것까지). 공론장에 밀려드는 새로운 목소리를 통합해야 한다. 물론 진실과 질서 사이에 올바른 균형을 찾으면서 말이다.


지금까지는 역사상 모든 정보 네트워크가 인간 신화 제작자와 인간 관료에게 의존해왔다. 누구를 마녀로 점찍어 화형시킬지, 누구를 쿨라크로 만들어 노예로 만들지, 간첩으로 몰아 처단할지 결정하는 것은 그래도 인간이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인간은 '디지털 신화 제작자, 관료'와 경쟁해야 한다. 이 속에서 진실과 질서를 지켜내는 일은 한층 어려울 것이라 예상된다.


모든 국가의 사람들이 심지어 독재자조차,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낯선 지능에 종속되는 상황에 놓여도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 숙제나 일을 대신해주고 우리 가족사진을 일러스트로 멋지게 표현해주는 재밌는 도우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내 일자리를 뺐는 것도 약과, 우리를 부리고 우리 삶을 통제할 권력으로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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