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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그랜드 피아노

[단편] 밤의 호랑이 (1/5)

by 걍마늘 Mar 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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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런 꿈을 꾸었다.


수영장이 있는 대저택이다. 테라스가 풀 사이드로 바로 이어졌다. 물은 햇살에 눈부시게 일렁이고, 선베드에 걸터앉은 나는 초조하게 기차 시간을 확인한다. 기차 시간은 다가오는데 나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선베드에 누워 있던 정체불명의 여인이 한 제안 때문이다.


“티셔츠를 돌려받고 싶으면 1시 반까지 내 방으로 와요.”


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내 티셔츠를 걸쳤다. 석양의 해변이 프린트된 아바나 티셔츠다. 쿠바 여행을 다녀온 지인이 선물한 기념품으로, <노인과 바다>의 배경인 아바나의 바닷가 마을과 마이애미 사이에 위치한 키웨스트 섬에 헤밍웨이의 작업실이 있다. 언젠가 꼭 한 번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아끼는 티셔츠다. 그런데 그녀가 말한 시간은 기차가 출발하는 시각. 기차를 놓치면 오늘 내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고민이 길어진다. 그녀가 두고 간 미소가 아른거린다.


그러나 나는 기차를 타기로 한다. 아바나 티셔츠를 포기하기로 했다. 꿈속에서는 무슨 선택을 해도 상관없는데.


꿈은 욕망의 찌꺼기라고 했나. 아니면, 무의식이 재구성한 가상현실 속에서 한 번 더 기회를 줘 보는 걸까.






커뮤니티 게시판을 기웃거리다 눈에 띄는 제목이 있어 클릭했다. <1박에 1700만 원인 호텔에서 3박 4일을 보낸 뮈>. 뮈는 세계적인 케이팝 그룹의 멤버 중 하나다.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뉴스가 됐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1박에 1700만 원’이라는 문구에 더 눈길이 갔다. 파리에서 열리는 패션쇼에 초청된 뮈에게 주최 측에서 제공한 호텔이라고 했다. ‘옥상 테라스가 있는 우아한 복층 객실’이라는 설명이 붙은, 40평에 가까운 30평대 루프탑 가든 스위트다. 사진을 보니 설명한 대로라 그 우아함에 대해서는 딱히 덧붙일 말이 없을 듯하다. 그저 1박에 1700만 원이라는 객실 이용료가 경이로울 따름이다. 게다가 뮈는 그런 스위트룸을 ‘혼자’ 썼다.


“예비 17번.”


노트북 너머로 아내를 봤다. 4인용 식탁에 마주 앉아 각자 자신의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던 중이었다.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행복주택. 예비로 당첨됐어.”


작년부터 공격적으로 주택공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공고를 확인했다. 두 달 간격으로 대략 육 개월 간 여섯 군데 청약을 넣었다. 그중 세 곳은 서류에서 탈락했고 서류를 통과한 나머지 세 곳 중 두 곳이 낙첨된 상황이었다.


“순번이, 나쁘지 않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옆집 밥상에 놓인 수저가 몇 벌인지 셀 수 있을 만큼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십 년 넘게 재개발 사업이 표류 중인 동네에 살았다. 동네가 고인 물처럼 썩어가고 있었다. 집주인들은 집에 돈을 들이지 않았고, 세입자들은 임대입주권이라든가 이주비를 기대하며 떠나지 못했다. 슈퍼에서는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을 팔았으며, 골목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주차 시비가 붙었다. 가끔은 새벽에도 시끄럽게 험악한 소리가 오갔다. 비좁은 집이, 비좁은 골목이 마음 씀씀이까지 각박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최악은 살인 사건이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겹겹이 이어진 지붕들 너머로 비죽 솟은 교회 지붕이 보이는데 그 교회의 목사가 여자 신도와 바람이 나 분노한 남편이 식칼로 목사를 찔러 죽인 사건이다. 경찰이 찾아와 수상한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처음 이 동네 왔을 때 생각나? 골목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잖아.”


“그랜드 피아노? 아, 기억나. 새것 같은데 왜 버렸을까 했더니 네가 그랬잖아. 놓을 자리가 없었겠지. 이사 간 사람이 버리고 간 게 아니라 이사 온 사람이 갖고 들어가지 못한 거라고.”


식탁이 주방의 절반을 차지했다. 말이 투룸이지 억지로 공간을 나눈 원룸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도 큰 방의 절반은 침대가, 작은 방의 절반은 옷장이 차지했다. 그래도 둘째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그때만 해도 놓을 자리가 없어 밖에 놓아둔 우리 안의 그랜드 피아노를 머지않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랜드 피아노는커녕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멜로디언조차 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 볼?”


“어딜?”


“임장. 어떤 동네인지도 모르고 넣은 거잖아.”


10년 후 시세의 80%로 분양 전환되는, 방 3개, 화장실 2개짜리 25평대 신축 공공임대 아파트다. 임대보증금을 최대로 올리면 월임대료가 지금 사는 집보다 적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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