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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읖 Dec 24. 2022

오늘도 반복되는 나와의 타협

내 마음의 마지노선은 현관 앞.

오늘과 내일의 경계. 어쩌면 어제와 오늘의 경계인 지금 이 시간. 이 작은 공간에 다시 돌아오는데 12시간이나 걸렸다. 현관에서 창문이 있는 벽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굳이 발자국을 남겨본다면 넉넉하게 열 다섯 걸음이면 충분할 것 같은 이 공간은 잔뜩 어둡고 그에 맞게 삭막하기까지 하다. 날 반겨주는 건 잠시 켜졌다 사라지는 센서등뿐이지만 이거면 충분하다. 오히려 삭막함을 방해하지 않는 거 같아 좋기도 하다. 


현관에는 슬리퍼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신고 들어온 운동화를 벗고 잠시 슬리퍼에 발을 얹어둔다. 신발장 문을 열고 비어있는 자리를 찾는다. 운동화를 넣어두고 나서야 집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몇 발자국을 떼니 엉망인 방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모른 채 하며 갑작스레 불어 온 찬 바람에 급하게 꺼내 입은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둔다. 가방은 그냥 바닥에 툭 던져뒀는데 잠시 스스로와의 타협점을 갖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대단한 타협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대로 화장실로 직행해 세탁 바구니를 채우고 씻고 널브러질 것인가, 이 차림새로 잠시만 이 자리에 주저앉아 하루의 고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보상으로나마 채워줄 것인가 하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고민이다.


평소에는 최대한 전자를 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굉장히 부지런하고 깔끔하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노력을 할 필요가 없겠지. 난 그저 나 스스로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저런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무언가 한 번 귀찮아지면 한없이 내려놓게 되고,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버겁게 다가올 것을 알기 때문에 귀찮음에 지기 전에 움직이는 거다. 그것뿐이다.


1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스스로와의 이 '타협'에서 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는 주로 지고 있다. 핑계를 대자면 하루에 12시간 이상 비어있는 이 공간에 다시 돌아올 때 너무나 지쳐버린 게 첫 번째, 그 상태로 스스로에게 보상 아닌 보상을 주자는 마음이 드는 게 두 번째, 한 번쯤은 져도 되지 않냐는 합리화가 세 번째.


결국 오늘도 졌다. 밝지만 왠지 따뜻하진 않은 주광색의 형광등 아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속절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후 남는 건 대부분 후회뿐이다. '이럴 거면 미리 씻고 편하게 누울 걸'이란 생각이 들곤 하지만 어차피 흘러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거고, 오늘도 그냥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거다.


오늘도 스스로와의 타협에서 져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현관 앞이 하나의 위안거리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지금의 나 만큼이나 엉망이 된 집안 꼴에 깨끗한 현관은 보이지도 않겠지만, 겨우 붙잡고 있는 내 마음인 거 같아서 이곳마저 난장판을 만들 수는 없다. 내일도 모레도 이 마지노선만은 지켜낼 수 있길 바라며 엉망이 되어버린 이 공간은 다시 내일의 나에게 미뤄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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