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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읖 Dec 27. 2022

냉장고 청소를 시작한다.

feat. 꾹꾹 눌러 담은 김장김치

대부분의 자취생 냉장고가 마찬가지겠지만 딱히 무언가가 없다. 처음엔 그리 크지도 않은 냉장고에 뭘 넣어둬야 하는지조차 감이 오질 않았다. 손이 크고 언제나 이것저것 반찬을 잘 만들어두는 엄마를 둔 덕에 텅 빈 냉장고가 생경해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당분간은 나만을 위한 냉장고가 생겼으니 조금은 채워보고 싶었다. 뭘 넣어둬야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의 냉장고 같을까.


만만한 게 음료였다. 그런데 나는 차가운 물은 한여름에도 잘 마시지 않는 편이라 생수를 잔뜩 넣어둘 필요가 없었다. 목을 많이 쓰는데 아이러니하게 목이 너무 약해서 따뜻한 물을 찾다 보니 '쪄죽따'에 가까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럼 아침 대용으로 마실 두유나 우유라도 채워둬야겠다. 멸균우유가 일반 우유에 비해 유통기한이 제법 길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한 박스 씩 주문하고 아예 한 칸을 채워버렸다. 술은 마시지도 못하고, 탄산은 배달음식이 아니면 찾지 않고. 그나마 냉장고를 채울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는 유산균 음료였다. 조금씩 채워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었고, 달걀 한 판을 사서 넣어둔 것 말고 더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가득 채운 냉장고는 포기해야겠다 생각했는데,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손이 큰 우리 엄마. 밥 챙겨 먹는 게 가장 중요한 엄마가 있었다.


우리 집은 여전히 50 포기 정도의 김장김치를 매 겨울마다 직접 담근다. 절인 배추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준비부터 꼬박 일주일 가까이 걸리는 연례행사다. 거기에 계절에 맞는 김치가 적어도 세 종류 이상은 구비되어 있다. 겨울이 되기 전부터 총각김치에 동치미는 일단 기본. 여름엔 물김치와 오이소박이 등등. 


이런 엄마가 나의 텅 빈 냉장고를 그냥 둘리 없었다. 엄마 기준엔 아주 작고 귀여운 김치통들이겠지만 잔뜩 눌러 담은 김장김치, 총각김치의 양이 절대 적지 않았다. 그리고 잘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각종 장아찌들과 직접 구운 김, 입맛 없을 때 내가 잘 챙겨 먹는 동치미 무침 등등. 내가 동의한 적 없었지만 허전했던 냉장고는 이제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채우나 고민했던 게 무안해질 정도로.


이걸 언제 다 먹냐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냉장고가 채워지니 뭔가 마음이 편해졌다. 대단한 음식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언제든 꺼내먹을 무언가가 있다는 건 참 든든한 거였다. 하지만 다음날 문제가 생겼다. 익지 않은 김치를 잘 먹지 않는 날 위해 엄마는 작년 김장김치 한 통과 올해 김장김치 한 통을 따로 담아왔다. 잔뜩 익은 김치를 먼저 먹고 좀 덜 익은 김치를 먹고 싶을 땐 꺼내먹으라는 엄마의 세심함이었다. 세심함까진 좋았는데 엄마의 큰 손은 혼자 있는 딸내미가 하나라도 더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는지 김치를 정말 꾹꾹 눌러 담아버린 거다. 그 작은 통 안에서 잔뜩 담긴 김치들은 숙성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김치국물이 오르락내리락하며 결국 넘어버렸다.


늦은 시간 퇴근을 하고 유산균 음료 하나 꺼내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을 때 그 참사를 발견해 버렸다. 이제 막 익어가는 김치국물에서는 채 가시지 않은 젓갈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고, 인내심을 꺼내 들 시간조차 없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김치를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이렇게 잔뜩 넣어놓고 간 거냐며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는데.


주방 청소용 티슈를 잔뜩 뽑아 들고 김치통을 빼내고, 선반을 빼내고 냉장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 사이 눌어붙은 김치국물은 잘 닦이지도 않았다. 빼낸 선반은 설거지를 하고 여전히 자국이 남아있는 냉장고를 닦기 위해 베이킹소다를 물에 타기 시작했다. 채 익지 않은 이 김치냄새도 좀 닦아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냉장고 청소를 시작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짜증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짜증을 잔뜩 부린 채 볼멘소리를 했던 나 자신이 조금 머쓱해졌다. 엄마 김치가 아니면 밖에선 김치도 잘 먹지 않는 주제에 그걸 너무나 잘 알아서 하나라도 더 먹으라고 꾹꾹 눌러 담은 김치에 내가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어서.


늦은 시간이라 엄마에게 전화해 쫑알거리지 못한 게 그렇게나 다행일 수 없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면 엄마 탓을 하며 얼마나 짜증을 부렸을까. 본의 아니게 시작한 냉장고 청소가 자기반성으로 마무리 됐고, 덕분에 깨끗해졌으니 내일은 엄마의 김장김치로 뜨끈하게 김치찌개나 끓여 먹어야겠다. 그리고 잘 익은 김장김치로 오늘은 든든하게 저녁 잘 챙겨 먹었다고 엄마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해야겠다. 꾹꾹 담은 그 마음이 넘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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