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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읖 Mar 27. 2023

타협할 수 없는 화장실 청소

화장실은 집에서 가장 깨끗해야 하는 곳이니까

어떤 곳이든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은 바로 '화장실'이다. 가장 깨끗해야 하지만 가장 더러워질 수 있는 공간이기에 꽤 신경을 쓰는 편이다.


이사를 하면서 공들여 청소한 곳도 당연히 화장실이다. 다행히 상태가 꽤 괜찮았지만 '썽'에 차지는 않았다. 각종 세제들과 청소 솔을 사들고 짐을 옮기기 전 화장실부터 닦아냈다. 요즘은 청소세제들도 향이 좋은 것들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왠지 특유의 락스향이 나야 제대로 청소를 했다는 느낌이 든다.


구석구석 세제를 풀어 닦아내고 뜨거운 물로 헹궈낼 때의 그 반짝거림은 어떤 이유로 쌓였는지 생각나지도 않는 마음속 체증 같은 것들도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샤워부스에 남아있던 물때도 깔끔히 사라지고, 세면대와 변기는 뽀득할 정도로 닦아냈다.


이렇게 열심히 청소를 했지만 이 상태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않을 거다. 물론 청소하는 고생을 덜기 위해 최대한 그때그때 정리하고, 조심히 사용하려 노력하지만 2주만 방치해도 아마 오늘 나의 노력은 없던 일로 치부해도 놀랍지 않겠지.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드는 상태를 만들어두고 이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들여 청소해 둔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상태로 출근을 해서 저녁을 챙겨 먹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두 시간여쯤 지났을까. 그 어떤 전조증상도 없이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소화가 안 되는 걸로 치부하기엔 울렁거림이 점차 심해졌고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할 시간조차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냈다. 대학원시절 얻게 된 위장병은 이렇게 언제든 불쑥 찾아와 사람을 괴롭히곤 했는데 당시 사람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있었고, 그 스트레스 덕에 두 달도 채 안 되는 동안 5kg이 쑥 빠져버렸었다. 그 와중에 이사까지 준비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아프지 않은 게 이상한 거였다.


더 게워낼 것도 없는데 계속되는 구역질에 화장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못했다.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갔을 땐 주변사람들이 핏기 없는 내 얼굴에 너무나 놀라워했고, 퇴근 후 나를 집에 데려다 주기까지 했다. 시간은 이미 늦어 문을 연 약국을 찾을 수도 없었고, 코로나로 응급실 이용도 어려운 시기였다. 무엇보다 집을 옮긴 지 사흘 밖에 되지 않아 근처에 병원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집에 남은 위염 약이 있는지 찾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남은 약이 있어 삼켜내고 병원을 찾아보니 그래도 가까운 곳에 내과가 있었다. 9시간 정도만 버티면 진료를 받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든 것도 잠시. 물과 약밖에 넘긴 게 없는데 위통은 또 시작됐고 나는 그렇게 아침이 될 때까지 몇 번이나 화장실에 기어들어가 위가 튀어나올 정도로 모든 것을 뱉어냈다.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집이라는 공간마저 낯설게 느껴지던 때, 배를 부여잡고 긴 밤을 보내면서 서럽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생각이 있었다. '화장실 깨끗이 청소해 두길 잘했다.'


대부분 혼자 있을 때 아픈 게 그렇게 서럽다고 하던데, 이렇게 아플 때 화장실이 깨끗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그게 더 고통스러웠을 거다. 서러움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좀 웃기긴 하다.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깨끗해서 좋다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그렇지만 내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화장실만큼은 더러움과 타협할 수 없다.'


덕분에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화장실만큼은 챙겨서 청소하고 있다. 아주 다행히 그 이후 저만큼이나 고생스럽게 아팠던 적은 없지만, 사람일이란 건 또 모르는 거니까. 혹시 나만큼이나 스트레스성 위염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화장실만큼은 깨끗하게 청소해 두라고 적극 추천할 거다. 귀찮아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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