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을 때 섞더라도 뭉쳐야 반죽이 된다
[Mix] 안성은(Brand Boy) 지음
섞을 때 섞더라고, 구심점은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마구 흩어지지 않고 밀도 있는 반죽으로 딴딴하게 뭉쳐 뭐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저자 브랜드보이는 책 'Mix'를 통해, 사실 섞는다는 행위 안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본질'을 더 강조하고 있다.
1. 잡지 모노클의 창립자는, 시중의 잡지 중 자신의 취향을 저격하는 게 없어서 스스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후 모노클'만이 할 수 있는' 오리지널 콘텐츠로 찐팬을 모았다. 오리지널 콘텐츠라는 단어를 보면 보통 넷플릭스가 먼저 연상되지만, 모노클의 사례를 보면서는 티빙이 떠올랐다. 티빙이 넷플릭스를 이기는 힘은, 다른 것들은 넷플릭스와 공유하더라도 tvN 예능만큼은 넷플릭스에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 이를테면, 나영석 PD의 작품들이나 환승연애, 유퀴즈 같은, tvN의 시그니처 알짜배기 예능 프로그램들. 실제로 나 또한 신서유기 때문에 티빙을 결제한 사람인 걸. 자신의 진짜 강점이 무엇인지, 잘 아는 거다. 예능에 있어서는 아직까지 티빙을 이길 자가 없는 대한민국이기에.
2. 애플의 전략 역시 본질에 집중했다. 데스크톱과 차별화되는 노트북의 본질이 휴대성이라는 점에 집중해 서류봉투라는 장치를 활용하며 노트북의 얇은 두께를 보여주었고, 대중화의 본질인 친근함에 방점을 둔 '애플(사과)'이라는 사명으로 PC의 보급에 앞장섰다. 그리고 현재는 마케팅의 본질적 대상인 타겟, 세상 모든 구매타겟을 아우르는 '인간'에 집중해 보편적인 정서를 터치하는 광고를 만들고 있다. 어떤 제품, 어떤 업계이든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만큼 광고의 본질적 목적을 충실히 이행하는 방법은 없다.
3.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을 앞두고 구글의 에릭 슈밋이 했던 "이 시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승자는 인류가 될 것"이라는 말은, 인공지능의 본질을 로봇이 아닌 기술을 만든 '인간'임을 이야기한다. 기술 뒤에 결국 사람이 있고, 기술의 승리는 기업의 승리이자 발전한 인류 모두의 승리라는 것을 떠올리면 어느 쪽이 이기든 패배감을 맛볼 필요가 없다는 진리를 아는 것이다.
4. 파타고니아의 브랜딩이 성공한 것은, 매출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기업의 사명보다 앞에 두지 않았다는 것, 즉 사명이라는 기업의 본질을 그 무엇보다도 충실히 지켜냈다는 데에 있다. 브랜딩, 조직문화, 파이확대, 고객확보 등. 기업의 모든 부분은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한정된 리소스 속에서 우선순위 역시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정신없이 성장하는 기업이, 아직 조직문화를 잡을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그 기업의 가치관에서 조직문화의 중요성은 후순위로 밀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정말 그들의 조직문화를 지킨 기업들은 수익과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서까지도 스스로가 초기 창업단계에 세워둔 원칙을 신념처럼 지켜왔다. 과감한 피드백과 자율, 책임으로 일하는, 그리고 서비스의 핵심가치인 '단순함'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버리지 않을 거라는 토스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5. 그리고 본질을 지키는 일은, 결국 기업의 성공(이 성공이 의미하는 결과물이 꼭 매출 대박이 아닐지라도)과도 배척되지 않을 수 있다. 고객을 사랑하면, 고객도 우리를 사랑해줄 거라는 더치브로스의 신조가 이를 방증한다.
6. 성공이라는 단어와 함께 붙는 유명 거대 기업들 역시 자신들의 업의 본질을 정의함으로써 스스로의 방향성과 오리지널리티를 발굴할 구석을 찾아냈다. 반도체를 시간 산업이라고 말한 삼성과 스스로를 쇼비즈니스라고 칭한 NBA, 아디다스가 아닌 닌텐도와 싸우는 마음으로 걸어온 나이키가 그랬다. 또, 아이스박스가 아니라 세련된 로망이라는 정체성을 파는 예티가 그랬다.
7. 반면, 실패한 이들은 하나같이 본질을 잃었다. '엄마'세대를 흘러간 고객으로 작별인사를 건네며 세대교체를 선언한 티파니는 티파니다움을 잃고 결국 어느 세대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 결국 딸은 자신의 뿌리인 엄마의 패션을 따라가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줄이 끊이질 않던 국밥집을 내쫓고 그 자리에 들어앉은 건물주도, 스무살짜리 만능 엔터테이너 이영지가 스스로 채널의 본질이 되며 차린 밥상을 뺏어간 '차린 건 없지만' 채널도, (영지와 분리 후 현재 구독자 44만명 vs 영지가 이후 연 채널 차쥐뿔 구독자 211만명) 본질을 잘못 파악하고 껍데기를 가지려 들면 이렇게 '망하더라.'
8. 나만의 독보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며 스스로 콘텐츠가, 동시에 스스로 미디어가 되어야 빛을 발할 수 있는 세상. 타란티노가 매년 200편이 넘는 영화를 분석하고, 브랜드보이가 매일 몇 개씩 기사를 보며 SNS에 글을 올릴 때, 나는 무얼 했나. 내가 덕질이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하는 건, 사실 어떤 대상이라기보다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느낌. 인풋이 생겨야 아웃풋의 깊이가 더해지는데 그저 마구 뱉어내는 데 바빠서 알맹이를 채우지 못한 글만 늘어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아직 나는, 좀 더 모방하고 훔쳐야 할 때라는 생각으로, 이번 연말을 맞이하고 있다.
9. 평소에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보여주는 생각 많고 정 많은 모습이 영락없는 F이지만, 일할 때면 논리든 매의 눈이든 파고들며 할 말은 하는 모습에 네가 어딜봐서 F냐는 말을 듣는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싶어서 트렌드의 흐름을 열심히 따라가며 파악하려 애쓰지만, 나의 플레이리스트에는 80, 90년대 노래들로 가득하다. 이런 나를 잘 섞어 뽀얀 반죽으로 뭉치게 해줄 나의 구심점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