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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자금은 100억도 부족하다

그릇이 계속커지는데 물이 찰 리가 없지.

by 제이니

나이가 중년을 좀 지나기 시작하면 은퇴하면 어떻게 먹고살지라는 생각이 거의 매일 들기 마련이다. 누구는 건물이 있다든지, 유산이 많다든지, 공무원연금을 받는다든지, 다들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뭐가 없다. 은퇴생각만 하면 우울해진다든지, 뭐 어떻게든 되겠지 라든지 희망회로를 돌리기 마련이다. 아무도 정확히 뭘 해야할지 알려주지도 않고, 그저 몇억이 있으면 은퇴가능하느니 안된다느니 말만 많다.


자산이 한 50억 있는 어떤 분도 은퇴하기를 꺼렸는데, 사회적인 욕구 외에도 은퇴자금이 '부족' 하다는게 이유였다. 아니, 연 2% 수익률만 얻어도 1억가까이 되는데 뭐가 부족하냐고 하니 "더 여유롭게 은퇴하고 싶다" 라면서 계속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럼 이 분이 100억을 모으면 충분할까? 아마 그때가면 "더 풍요롭게 은퇴하고 싶다" 며 은퇴자금이 부족하다고 할 것 이다. 거의 확실하다.


반면 어떤 분은 한 30년일해서 자산을 3억정도 모으신 분이 있는데, 이 분은 "아 이정도면 그냥 은퇴해서 조용히 살기에 충분할 것 같다" 라고 하면서, 소일거리는 하지만 잘 살고 있다. 이 분은 혼자 사는분이고 굉장히 검소한 분이라서 딱히 위태로워보이지는 않았다.



누구는 50억도 부족하다고 하고, 누구는 3억이면 될 것 같다고 하고. 이것이 사실 은퇴시장이 웃기는 이유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50억도 부족하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은퇴시장은 대표적인 공포마케팅의 장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말에는 10억모으기 모임같은게 있었고, 10여년 뒤의 2010년대말에는 "그래서 10억 만든 분들 많지만, 충분합니까?" , 2020년대에는 "10억 나부랭이 아파트 하나도 못 사는데 서민이지" 라고들 한다. 뭐 어디까지 따라가줘야 되는 걸까?


공포의 레이스는 들어가는 순간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일론머스크도 대공황오면 거지될수 있으니 대비해라 뭐 이딴 마인드인듯. 이런 공포의 최대 수혜자는, "지금이라도 준비해라" 라며 마지막 동앗줄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은 금융회사들 뿐이다. 물론 일찍 준비는 해야지, 하지만 그게 공포에의해 억지로 떠밀리듯이 금융사들 돈벌어주면서 할 필요는 없을 뿐이다.


그리고 꼭 돈만이 은퇴를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나이들어서도 할 수 있는일을 찾아서 하면, 사실 은퇴준비는 끝난 것이다. 변호사나 의사가 딱히 연금이 없다고 굶어죽지 않지 않나. 한달에 50~100만원 벌 수 있는 일들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으니, 그걸 해도 좋고, 좀 더 전문적인 일을 배워도 좋다. 청년들이 자존심때문에 기피하는 일들을 얼굴에 철판 많이 깔린 노인들은 할 수 있다. 나이들어 좋은 점은, 남들한테 별로 신경 안쓰게 된다는 점 아닌가. 나이들어서까지 자존심 세우려면 그냥 은퇴자금 100억 벌어두면 된다. 자존심은 에르메스보다 더 비싼 사치품이다.



은퇴자금 1억을 모으는 대신, 1억원어치 기술을 배우거나 공부를 하면 보통 자신의 가치는 10억이 올라가게 된다. 자기 자신의 가치가 올라가고,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면 은퇴자금이 무슨상관인가. 하지만 대부분은 1억원으로 좋은 차를 사지, 본인의 능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


1억원을 본인에게 투자해서 얻은 10억의 가치는 대공황이 오든, 전쟁이 나든 사라지지 않지만, 은퇴계좌의 100억은 전쟁한번 나거나 대공황이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우리는 미래가 불안해서 계좌에 돈을 쌓아두지만, 불안한 그 미래가 실제로 대공황이나 전쟁으로 일어나게 되면, 정작 계좌에 있는 그 돈은 휴지조각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싶다면, 은퇴계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나이가 들면 힘도 없어지고 머리도 전처럼 돌아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 능력이면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는 무지하게 많다. 그리고 남들처럼 살겠다는 집착만 버리면, 인생은 할 수 있는 것으로 가득 찬 마법과 같은 것이다.



내가 가진 그릇이 계속 커지면 물을 결코 다 채울 수 없지만, 그릇이 점점 작아지면, 물은 알아서 차게 된다. 삶을 미니멀하게 살면, 들어가는 생활비는 엄청나게 작아진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가 해왔던 익숙한 것들을 계속 해야겠다는 집착이 남아있으면, 지구 어딜 가든 들어가는 생활비는 높으며, 그 비용을 일하지 않고 대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늙어보면 알겠지만, 먹는것도 별로 재미없고, 여행도 뻔 하고, 골프는 허리만 나간다. 뭘 해도 별로 재미가 없어진다. 안해도 그만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저런걸 계속 하는 것은, 그냥 여태껏 해왔던 익숙한 것들이라서이다. 익숙한 것들을 '못 한다는' 상실감이나 열패감은 그냥 느낌일 뿐이다. 그런 느낌 때문에 100억 레이스에 들어가 삶의 모든 것을 은퇴계좌에 바친다는 것은 억울하지 않나?



우리나라 상위 1퍼센트 가구의 순자산액은 33억정도라고 한다. 30~40년을 열심히 일하고도 100명중에 1등이 되지 못하면 상실감과 열패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문을 닫는게 맞다. 이제는 공포의 레이스를 그만 둘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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