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사칭 연애물/탐정물이 아닌 법정물
나는 한국 법률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는다. 무슨 조폭 변호사니, 마피아변호사니, 길거리니 천원짜리 변호사니 이딴 '법' 을 주제로 한 휴먼/연애/기껏해야 탐정물 같은 것들은 온갖 클리세로 떡칠된 삼류 장르물들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건 딱히 감독이나 작가탓을 하기는 애매한 것이, 한국의 법률은 대륙법체계인 성문법이기 때문이다. 대륙법 자체가 어떤 일반적인 원칙을 다수의 사건에 적용하는 벼락치기식 법률이라 사건별로 다른 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고, 변호사나 검사의 법률해석에 대한 재량권이 영미법에 비해 상당한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법정드라마의 경우에는 좀 더 다이나믹하고 지적인 전개가 가능한 반면에, 일본이나 한국의 대륙법체계에서는 판에박힌 판결, 이미 유무죄는 정해져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민사소송조차 법전을 수학적으로 해석해 판결하기 때문에, 극적인 경우가 나오기 힘들다.
법정물의 본고장인 미국조차 결국 시리즈가 길어지면 초반의 날카로운 법해석과 그로 이끌어내는 반전이 사라지고 결국 지루한 탐정물 또는 음모물로 변화해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한국은 오죽할까. 그저 정의로운 변호사나 검사를 주제로 휴먼드라마나 만드는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의 생각에 그나마 변화를 준 것이, 박경수 작가의 '펀치' 와 '귓속말' 이다. 물론 이 작품은 엄밀하게 법을 주제로 했다기 보다는 '법권력' 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지만, 형사소송법이나 민사소송법 (사실 이런 절차법들이 한국에서 극화하기 가장 쉬운 법들이다.) 을 긴장감있게 만들면서, 그나마 법률 드라마로서 최소한의 요건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에는 알다시피, 맨날 뻔한 배우들 (알고보니 좋은놈이었네 라든가) 이 연기하는 조폭 변호사니, 하이에나니 이딴 뭐 법정물도 아닌 그냥 변호사 검사 허세떠는 이따위 작품들가지고 법정드라마랍시고 쳐만들고 곧 쓰레기통으로 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에스콰이어를 보았는데, 여주인공이 입사 면접때 구술로 판례에 대한 해석을 하는 모습을 보고, 아 이 작가는 리갈마인드가 있는 사람이구나 싶어서 계속 보게 되었던 것 같다. 뭐 그렇게 복잡한 사건은 아닌데, 민법을 공부하다보면 황당하지만 민법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해석들이 판례들에 꽤 많은데, 그런 점 들을 잘 살린 것 같다. 주제가 대부분 민사인 것도, 법률드라마로서 극적인 효과를 더 잘 줄 수 있었던 것 같고. 사실 법을 공부하다보면 형법은 어차피 다 정해져있어서 그냥 증거와 법률 외에는 뭐 건드릴 수 있는게 없지만 '사건' 은 흥미로우니 대부분의 법정물이 형사사건을 다루게 되는데, 영미법에서는 이게 통하는데 한국이나 일본법에서는 그저 '증거찾기' 게임인 탐정물이 될 뿐이다. 그런데 민사를 주제로 극이 진행되니, 좀 자유도가 확보된 느낌이다. 민사의 세계는 광활하니까.
에스콰이어에는 연애도 없고, 엄청난 음모도 없다. 거창한 휴먼드라마도 없고, 그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변호사들이 나온다. 극이 정수리를 찌르는 듯한 아찔함은 없지만, "세상일이 꼭 드라마틱해야 해?" 라고 작가가 반문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 그리고 잘 만든 드라마이다. 아이돌 출신 배우는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되지만, 이 배우는 전작들도 그렇고 작품을 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배우들은 "나를 외모가 아닌 연기력(지능) 으로 평가해 달라" 라고 하지만, 작품을 고르는 것을 보면 대가리가 좋은지 나쁜지는 다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