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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이름은N잡러 Sep 15. 2020

어느 날 꽉 찬 20대

가족을 지켰다는 훈장

몇 년 전 ‘캐리어를 끄는 여자’가 인기리에 방송했다. 나는 그 드라마를 사수했는데, 주인공 최지우가 나와 같이 캐리어를 끌고 ‘일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최지우는 캐리어 안에 문서들을 가득 넣고 법원과 로펌을 왔다 갔다 했다면, 나는 캐리어 안에 논술 자료들과 각종 생필품을 넣고 수업과 수업을 오갔다. 매일 자는 곳이 달라 챙겨 다닐 것도 많았다. 


‘캐리어를 끄는 여자’가 방영되는 동안은 캐리어를 끌고 다닌다는 것 때문에 줄기차게 최지우와 비교당했다. 학생들은 내게 말했다. 

“선생님, 최지우 따라 하는 거예요?”

“최지우는 캐리어 끌고 일하러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수업 끝나고 놀러 가려고 그러죠?”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캐리어 안에 세면도구, 여벌의 옷, 플랫슈즈. 즉 여행 갈 때 필요한 물품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수업하러 내려온다는 사실을 아는 학생들은 수업 끝나고 근처에서 노는 줄로 알았던 거다.


매 번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통에, 동네에서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한량으로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얼굴을 보면, 음... 승무원으로 생각할 리는 없으니, 답은 한 가지 아닌가.     


고된 일정에 캐리어 손잡이가 먼저 파업했다. 캐리어가 일 이 만원 하는 것도 아니기에 손잡이를 테이프로 돌돌 싸매고 붙여서 끌고 다녔다. 이번에는 바퀴들이 파업했다. 마음만은 승무원이었던 내가 꼿꼿하게 캐리어를 끌고 가는 중에 바퀴 하나가 깨졌다. 억지로 끌고 가다가 두 개의 바퀴가 탈출했다.    

 

결국 캐리어를 버리고 새 캐리어를 장만해야 했다. 고장 난 캐리어를 버릴 때는 마침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던 아주머니께서 한 말씀하셨다.

“여행 많이 다니나 보네~”


자초지종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렇다고 답했다. 이번에는 어딜 다녀왔냐고 물어왔다. 나는 일본 오사카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자신도 오사카에 갔다 왔다며, 말을 이어나갔다. 몇 분간 어쩔 수 없는 대화가 오간 후, 아주머니는 세탁기를 꺼야 한다며 들어가셨다.


일 년 전에 오사카를 갔다 온 적이 있어서 잽싸게 오사카라고 대답했던 건데, 다행이었다. 엉뚱하게 미국에 다녀왔다고 했는데 자신도 간 적 있다며 대화를 걸어왔으면 민망한 장면이 연출될 뻔 했다.

   

가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가면 여행 얘기가 나오곤 했다. 어떤 사람은 여행을 다니느라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여행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가고 싶은 여행, 갖고 싶은 물건을 다 참으며 돈을 모았단다. 이제 결혼자금을 모았으니, 결혼해서 배우자와 하고 싶은 걸 같이 할 거라고 했다. 이런 때에 내 차례가 오면 곤란했다. 여행을 많이 다녔나? 그럴 리가. 그렇다고 돈을 많이 모았나? 빚잔치 중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소주 한 잔 들이켜고 ‘내가 말이야...’하며 다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잘못한 일은 없는데, 그렇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일도 아니었기에.


그런 만남을 갖고 돌아오는 길이면 시무룩해졌다. 잠깐잠깐 방황한 적은 있지만, 할 일은 다 하고 살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하고 싶은 일도 다 해봤다. 정신 차린 다음부터는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날개를 펴고 날아야 할 순간, 나는 낙하했다. 친구들은 하나 둘 회사에 입사했다. 친구들이 평균적으로 3년 차 정도의 경력을 쌓고 있을 때 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대학생 때 대외활동을 하러 가면 나는 항상 막내였는데,  이십 대 후반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가니, 어딜 가나 왕언니는 내 차지였다. 

    

“내 이십 대 후반을 누가 싹둑 잘라간 기분이야”

친구들에게 곧잘 이렇게 얘기했다. 모두가 겪는 위기를 좀 더 빨리 겪었다고 생각해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왜 하필 이십 대란 말인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하는, 가장 빛날 때라는 이십 대의 절반을 돈만 벌며 지내다니. 누구보다 팔딱거리던 내가 말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십 대의 절반을 샤랄라 하게 보내지 못했지만, 내 지난날들을 생각해보면, 나는 매 순간에 충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최선을 다해서 가족을 지키려고 했고, 지켜냈다. 누군가는 여행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했다면, 나는 돈을 벌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우리나라 곳곳을 다녔다. 그 지역만의 특성 있는 음식을 먹고 풍경을 보았다.‘돈’으로 엮이면 누구보다 추해질 수 있는 인간의 어두운 면도 보았다. 반면 언제나 내 편이었던 친구들을 보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누군가처럼 돈을 모으지 못했다. 내 통장은 구멍 뚫린 항아리였다. 끊임없이 물을 부었지만, 물을 붓는 즉시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구멍을 때우는 방법을 배웠다. 틈틈이 구멍을 때워서, 처음보다는 구멍이 제법 작아졌다. 만약 나에게 또 경제적 위기가 찾아온다면, 이번보다 훨씬 잘 극복할 자신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느끼고 또 느꼈다. 떨어져 있으면 서로를 생각하며 눈물짓다가도, 같이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지지고 볶게 되는 것이 가족이다. 온 가족이 함께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이다. 다만 일상이기에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뿐이다. 일을 끝내고 집에 갔을 때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날 때, 엄마 아빠가 옥신각신하며 누구 말이 맞는지 내게 물어볼 때, 동생이 만 원만 줄 수 있냐고 물어볼 때. 그럴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가족을 지켜낸 것, 이십 대에 이보다 큰 훈장을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어느 날 돌아보니 나의 이십 대는 꽉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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