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글 쓰는 마케터다. 에디터라고 하자니 마케팅에 필요한 글쓰기를 더 많이 하고 마케터라고 하기엔 글쓰기가 왕창 가미된 일들을 주로 하고 있다.
이렇게 구구절절 내 일에 대한 소개를 하고 나면 국문학과나 언론홍보학과를 나왔냐는 질문이 이어지곤 하는데 아니다. 나는 경제학과 출신이다. 그래서 이론은 1도 모르는 비전공자이기에 독서로 핸디캡을 넘어서고자 발버둥 쳤다. 지금도 이쪽 분야 책만 보면 일단 장바구니에 담고 본다.
그래서 오늘은 나와 같은 비전공자 마케터를 위한 추천도서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1. 정의란 무엇인가
독서 포인트: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본질을 보는 방법
이 책은 물건이다. 이 책이 출간되는 해 책 내용 전부를 정리하여 요약본을 만들었다. 당시 논술과외를 활발하게 했는데, 그 요약본을 읽고 논술과 토론을 하게 했다. 그 해 여러 대학 논술시험에서 이 책 본문이 등장했고, 나의 학생들은 우르르 붙었다.
책 추천 이유가 나올 줄 알았더니 내 자랑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에게 한마디 하자면, 그만큼 중요한 책이라는 말씀. 이 책은 사례를 소개하고 관련된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계속 생각하고 선택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글 쓰는 마케터라면, 어느 현상에 대해 서술할 때 그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남과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고 더 깊이 있는 글이 완성된다.
·상황1: 당신은 전차 기관사, 시속 100킬로미터로 철로를 질주 중. 저 앞에 인부 다섯이 철로에 서있지만 브레이크 고장으로 전차를 멈추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때 오른쪽에 있는 비상 철로가 눈에 들어왔지만 그 곳에도 인부 한 명이 서있다. 어떻게 하겠는가?
·상황2: 당신은 기관사가 아닌 철로를 바라보며 다리 위에 서 있는 구경꾼. 저 아래로 철로로 전차가 들어오고, 철로 끝에 인부 다섯이 서있다. 이 때 당신 옆에 서있는 덩치가 산만 한 남자를 발견. 그 사람을 밀어 철로로 떨어뜨릴 수 있다. 그러면 남자는 죽겠지만 인부 다섯은 목숨을 건진다(당신이 직접 철로로 몸을 던져서 전차를 멈추기엔 몸집이 작음). 비상철도도 없다. 어떻게 하겠는가.
·상황3: 상황2와 같지만 구경꾼인 당신은 덩치 큰 남자를 직접 밀지 않고도 철로로 떨어지게 할 수 있다.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것은 맨홀처럼 아래로 통하고, 당신은 핸들을 돌려 뚜껑을 열 수 있다. 이 경우라면 핸들을 돌리는 행위가 옳은 일인가?
상황3까지 모두 생각해보고 상황1로 돌아오면 이제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게 이 책의 매력이다.
2.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독서 포인트: 프레임은 내가 정한다, 논점을 선점하는 방법
이 책은 ‘프레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단언컨대 이 책을 다 읽고나면 말빨이 는다. 책의 시작은 이렇다. ‘분홍색 코끼리 생각하지마, 알았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해도 어느새 머릿속엔 분홍색 코끼리가 걸어다닌다. 코끼리는 분홍색이 아닌데도 말이다.
저자는 말한다. 상대편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편의 언어를 사용해선 안 된다고. 상대편의 언어는 그들의 프레임을 끌고 오지 내가 원하는 프레임으로 기능하지 않는다고. 논리정연하게 반론을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마케팅 글쓰기를 하다 보면 단어 하나하나에 고민하게 된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좀 더 오랫동안 회자되길 원한다면 ‘프레임’을 정복하자.
상대편의 진짜 목적이 그가 말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직하지 못한 것. 예의 바르게 그의 진짜 목적을 지적해 주고 프레임을 재구성해야 한다. 예)보수주의자들이 작은 정부의 미덕을 찬양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보수주의자들은 군대나 FBI, 재무부나 상무부, 회사법을 지지하는 대다수 법관을 없애길 원치 않는다. 그들이 없애고 싶어하는 것은 서민들의 자활을 돕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임을 지적해야 한다.
상대를 존중하라. 프레임을 재구성함으로써 대응하라. 가치의 차원에서 사고하고 발언하라. 자신이 믿는 바를 말하라. 당신은 할 수 있다.
3. 메모 습관의 힘
독서 포인트: 글감 소재 고갈을 겪지 않으려면, 전략적으로 메모하라
이 책은 다섯 번도 넘게 읽었다. 메모를 습관화하고 싶은 마음으로 지금도 발췌독을 즐긴다. 저자가 지금까지 써온 메모 방법을 아낌없이 공개한 책으로, 제목은 '메모 습관의 힘'이지만 메모부터 글쓰기까지 아우르고 있다.
글 쓰는 마케터는 하루에도 여러 번 글을 쓴다. 그것은 인스타 광고에 들어가는 한 마디일 수도, 몇 줄짜리 피드 내용일 수도 있다. 어제와 같은 내용을 다르게 어필해야 하는 건 부지기수다. 그런 고비를 무사히 넘기려면 메모는 필수다. 중요한 건 메모에도 방법이 있다는 거다. ‘그냥’ 말고 전략적으로 ‘잘’ 메모하자.
메모리딩을 할 때는 책의 중요부분을 저장해두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내용에 대한 나의 반응을 기록하는 것이 메모리딩의 목적이다. 메모리딩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자. 저자가 말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내 삶에 적용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바로 해답을 찾아도 좋지만, 한동안 질문을 품고 다니면서 가슴에서 나오는 해답을 찾아보면 좋다.
나는 고골리가 쓴 <외투>의 주인공, 아카키예비치와도 같다.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베끼고 쓰고, 또 베끼고 쓰는 가운데에서 쾌락을 느낀다. 과학연구에서도 나는 단순업무적인 일이 즐겁다.
위 인용문은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이 쓴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정신세계사, 110쪽)에서 옮겨온 것이다. 구소련 과학자인 류비셰프의 삶을 추적한 책인데, 인용문에서 보듯 단순반복의 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나는 잠깐의 시간이 날 때 책을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4. 문장수집생활
독서 포인트: 책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적재적소에 쓰는 방법
이유미 작가의 책은 빠짐없이 챙겨 본다. 유명한 카피라이터이자 마케터의 책이기 때문이다. 문장수집생활은 저자가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으며 메모를 하고, 그 메모가 어떻게 카피로 변신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소설 속 곰팡이에 대한 세밀한 묘사 장면을 볼 때면 언젠가 ‘제습제’에 대한 카피를 쓸 때 참고해야지 하는 식이다.
이 책을 다 읽자마자 29cm 어플을 깔았다. 스크롤을 휙휙 넘기며 카피 여러 개를 읽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었다. 책을 읽을 때도 내용적으로 인상 깊은 것 따로, 나중에 글감으로 활용하기 좋은 것 따로 체크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나는 언제 어디서나 이 책을 활용하기 위하여 전자책으로도 실물책으로도 갖고 있다. 그 정도로 좋다.
책에서 읽은 내용
1시가 넘어서야 수분 크림을 듬뿍 바르고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얼굴에 두껍게 덮인 크림이 이불에 묻을까봐 마음대로 뒤척이지도 못하고 꼿꼿하게 누워 눈만 껌뻑이다가 새벽에야 설핏 잠이 들었다. 결말이 없는 많은 꿈을 꾸었다. 참을 수 없게 피곤했고, 화장이 잘 먹지 않았다. 조남주[82년생 김지영]
카피로 변신
두껍게 바른 수분크림이 베개에 묻을까 봐
꼿꼿한 자세로 잠을 잔 적이 있다면
워터팩 하고 마음껏 뒤척이다 잠드세요
축축한 베개는 없고 촉촉한 얼굴만 남습니다
'축축'과 '촉촉'이란 의태어로 라임을 맞췄다. 설명적인 카피보다 감각적으로 꽂히도록 쓰고 싶을 땐 이런 방법을 쓴다. 하지만 너무 자즈 쓰면 가벼워 보일 수 있고, 고가의 제품에는 다소 격(?)이 맞지 않으니 쓰지 않는 게 좋다.
5.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독서 포인트: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아이디어가 샘솟았던 책입니다.
일단 사과부터. 오해해서 미안하다. 제목만 보고 동성커플의 이야기인줄 알았다. 예상했던 내용과 달라 놀라고 너무너무 잘 쓴 에세이라 한 번 더 놀랐다.
동성커플은 아니고 그냥 동거인일 뿐인 두 여자가 함께 쓴 책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글빨을 뽐냈다. 시크한 듯 진솔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며 참신한 묘사들은 저절로 펜을 들게 했다. 언젠가 글감으로 쓰려고 밑줄 치다가 결국 포기했다. 책 전체에 밑줄을 긋느니 필요할 때마다 다시 읽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다.
나는 마케터가 추천하는 책은 챙겨 읽는다. 마케터의 시선에서 참신한 책이라면 나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 책을 추천한다. 앞서 소개한 책들처럼 무언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도움 되는 건 아니지만, ‘아니 이걸 이렇게 표현한다고?’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책이므로.
보석 같은 수많은 문장 중에서 밑줄 긋기를 포기하기 전에 밑줄 그어둔 몇 문장을 소개한다.
다시 보니 어스름한 달빛에 내가 잘못 본 거였고 그건 모두 하얀색 쓰레기봉투였다. 쓰레기봉투가 옥상을 가득 채워 눈밭처럼 아름다웠다…고 지난날을 왜곡해본다.
가스레인지는 그간 황선우의 피가 되고 살이 된 음식의 흔적이 기름때와 함께 차곡차곡 쌓인 역사책과도 같았는데, 나는 세제와 수세미로 그 역사를 종식시켰다.
어느 날 황선우는 내게 예쁜 양말을 선물로 주었다. 해리포터에 따르면 집요정 도비는 양말을 선물 받으면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런데 도비는 그 양말을 신은 채 가스레인지를 닦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나는 간병인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동거인이 나의 주보호자로서 베풀어준 가장 큰 부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플라스틱 공 하나 띄우려 애쓰고 있는 내가 사실은 하프 마라톤을 몇 번이나 완주한 사람이라는 걸, 진통제에 멍해져 있지 않을 때는 재미있는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방귀 뀌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인 지금의 내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실은 겨우 3박 4일이지만 가장 무력하고 약해졌을 때 내가 사라지지 않게, 또 최선을 다해 나로 돌아갈 수 있게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막연하게 꿈꿨던 삶의 방식이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쓰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카페에 가고. 며칠동안 집 밖에는 나가보지도 않은 집순이로 지내다가 바깥에 나가야하는 일정이 생기면 그 날 몰아서 바깥공기를 마시고 오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하루하루. 내가 원한 삶의 방식이 돈이 많거나 재택근무를 해야 가능하다는 것은 참 늦게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소개한 책의 저자 김하나와 황선우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원래 멀리서 보면 아름다운 것들도 가까이서 보면 깬다고 하지만, 글쓰기로 영위하는 삶이란 언제 봐도 부러울 뿐이다. 그래서 오늘도 책을 읽는다. 내 밥그릇 내가 지키려면 쓰고 또 써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글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