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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단 May 01. 2023

지나간 것은 지나친 후에야 알 수 있다

영화 <폭설>

나는 평생 나를 볼 수 없다. 눈으로 나의 전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물리적 한계는 물론이거니와 가장 여리고 약한 면을 깊은 내면에 숨겨두어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까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순간적인 반응. 그것들이 켜켜이 쌓여 자신마저 그 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일상은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하다. 내가 나를 잘 몰라도 하루는 무탈하게 흘러가다 끝이 나고,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하니까. 이쯤 되니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도 같다. 가끔 혼란을 맞닥뜨리긴 해도 다들 이 정도의 복잡함은 껴안고 살아가니까. 거창하게는 인간의 숙명이라 여겨도 될 것 같고.


혹은 나는 생각보다 나 자신을 잘 아는 걸지도 모른다. 무엇이 내게 편하고 불편한지 구분할 줄 아니까. 나름 평화롭던 일상. 균열은 언제나 나쁜 것에서 비롯되진 않는다. 미루고 미뤄온 나 자신에 대한 직시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 잘 모르겠는, 혹은 모르고 싶은 것마저 헤집어 놓는 사람. 그 사람의 등장으로 지극한 현실은 깨지고,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Synopsis

강릉에 있는 한 예술고등학교의 연극영화과, 수안은 하이틴 스타인 설이와 급격히 가까워지며 어느 늦은 밤 무작정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 설이와 함께 서울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후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지만 오해가 쌓인 채로 설이는 수안을 떠나가게 되고, 훗날 배우가 된 수안은 설이에 대한 그리움에 겨울 바다로 돌아간다.



*스토리 전개상 주요한 스포일러는 거의 없습니다.



본격적으로 나의 미래, 그러니까 진로를 고민하는 시기는 언제인가. 어렴풋이 '나는 뭐 해 먹고살지?'라는 물음은 한두 번쯤 품어봤겠지만,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하는 고등학생 무렵 아닐까. 갈팡질팡하는 또래 친구들이 태반이건만 드물게 제가 갈 길을 반짝이게 닦고 있는 소수를 마주치기도 한다. 수안에게 설이가 그랬다. 똑같이 연기가 하고 싶은 배우인데, 이미 드라마 주연을 몇 번이나 해본 설이.


흩날리는 긴 머리칼, 분홍 빨강 따위의 화려한 색조가 잘 어울리는 오목조목한 얼굴, 묘한 분위기까지. 짧은 머리칼에 화장기 거의 없는 수안과는 정반대의 삶인 걸 몸소 보여주기라도 하듯. 수안은 그런 설이를 보며 은근히 부러워하며 동경한다. 무얼 해도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세상의 찬사를 몽땅 껴안는 그 애.


수안의 부러움은 열등감이나 질투로 번지지 않는다. 설이와 자신은 다른 사람이다. 수안은 이런 면에선 자기 자신을 잘 알기에, 세상의 뻔한 잣대나 몰지식함 앞에서도 네가 틀렸다고 지적할 수 있는 담대함을 지녔다. 설이의 눈엔 그 모습이 반짝거릴 것이다.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 나와 다르게 분명한 기준을 갖춘 사람. 유약한 자신과 다르게 단단한 느낌.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자신이 가장 가지고 싶은 면을 발견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일상에 허덕이다 보면 스스로 느끼는 어렴풋한 찝찝함을 완전히 무시하고, 무시하다 보면 자신의 길이 옳았던 것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



배우가 맡는 무수한 역할들은 지금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고로, 끊임없이 타인을 연기한다. 마치 내가 된 것처럼. 내가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에서 당연히 받아들여지는 다른 사람들을 연기하다 보면, 그리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자신보다 더 빠르게 알아차리는 익명의 대중을 보면, 마치 그들이 기대하는 내가 나 자신 같다. 아니, 그게 맞는 것 같다.


사회가 좋아하는 일반적인 특성을 모두 갖춘 사람은 언뜻 보면 행복할 일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겉모습은 그 안에 든 것까지 비춰내지 못한다. 그럼 무엇이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가. 거울이다. 내가 마주하는 지금의 나는 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해서, 그게 숨이 막혀서 도망치고 싶어 진다. 복잡한 내면을 잠재울 자극적이고 시원하고 재미난 것들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수안과 설이는 서로가 있기에 모면이 쉬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되레 어려워진다. 나를 비추던 거울은 눈길을 돌리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은 마음대로 제거하거나 치울 수 없다. 나 자신을 가장 깊게 드러내는 존재를 막아서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 피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자유분방해 보이는 수안의 심연은 결코 설이와 다르지 않다.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린다. 자신에게 가장 편한 게 있다고 한들 그건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다르니까. 그래서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낼 만한 시도를 꿈꾸며 미약하게나마 시작하지만, 함께 하겠다던 설이는 온데간데없다. 누가 먼저였을까. 가장 투명하게 서로를 비추던 거울은 얼룩이 덕지덕지 묻은 채 더 깊은 곳으로 묻어진다.



두 사람은 상흔을 남긴 채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듯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동일한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인지. 이 답은 현실에서 치이고 살면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깊은 내면에 들어가려면 끝도 없이 희거나 푸른 것에 제 발로 들어갈 수밖에.


이로써 본래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넘어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순간들을 맞닥뜨리며 투쟁한다. 꼭 붙어 다니던 어린 날의 둘은 제각각으로 분리되었다. 으레 좋다고 말하는 무형의 산물들을 얻고, 기꺼이 신기루처럼 놓치고, 결국엔 홀로 남은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거세게 몰아치는 현실을 몇 번이나 온몸으로 부딪혀 낸, 그 시간을 모두 통과해 낸 나 자신을.








Schedule

2023. 04. 29 / 13:00 (230) 메가박스 전주객사 2관

2023. 04. 29 / 13:00 (235) 메가박스 전주객사 8관

2023. 05. 01 / 10:00 (411)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2023. 05. 05 / 13:00 (822) CGV 전주고사 7관



제24회 전국국제영화제 (JIFF)

2023.04.27(목) ~ 2023.05.06(토)




*씨네랩에서 전주국제영화제 기자로 참석하여 관람 후 작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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