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이데올로기는 (...) “기존의 과학모델을 모방하고 스스로 과학이 되려고 하는 확고한 야망”을 지닌 지식을 의미한다.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이미 제도화된 과학을 옆에서 곁눈질하는 지식으로, 제도화된 기존 과학의 권위를 선망하며 그 양식을 닮으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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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내가 과학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은 과학이 곧 진리의 대명사인 것처럼 이해함을 뜻한다. 과학 이데올로기는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주로 "~는 과학이다"라는 서술이 "~는 참이다"라는 서술과 동치인 것처럼 사용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런 생각이 많은 이들의 뇌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학문 분야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를 과학으로 명명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예컨대 어떤 진화심리학 추종자가 "진화심리학은 과학입니다"라고 역설하고픈 욕망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추종하는 담론이 진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고, 진리라는 낱말이 과학으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심리학 종사자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심리학을 과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어 했고, 그 결과 과학의 '이미지'에 맞는 것들만 심리학의 영역 안에 남겨두려는 경향이 생겼다. 과학이라는 낱말이 진리와 동의어로 사용되든 말든 진리만 추구하면 문제는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만 일이 돌아간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 '상상'을 가지고 그 이미지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과학의 이미지에 끼워 맞추려 한다는 게 바로 인용한 글에 나오는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이미 제도화된 과학을 옆에서 곁눈질하는 지식으로, 제도화된 기존 과학의 권위를 선망하며 그 양식을 닮으려 애쓴다"라는 말의 의미다. 과학적 이미지란 무엇보다도 하얀 가운 입은 사람들이 있는 실험실 풍경, 온도계의 눈금, 계량기의 계기에 표시되는 디지털 숫자, 시험관의 눈금 등으로 대표되는 것으로, 이 풍경의 핵심은 „눈금“이다. 눈금이란 무엇인가? 바로 측정, 계량 등이다.
학사과정 때 아동 임상 심리학을 맡은 교수 부부는 하루가 머다 하고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과학적으로 다루어야“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 교수 부부가 „과학적“ 이라는 말로 의미했던 것은 정확한 계량이었다. 예를 들어 운동 능력을 검사할 때 오차 없이 정확한 위치에 기구들을 세팅하고, 초시계를 사용해 정확하게 수행 시간을 기록하고, 뭐 그런 것들 말이다. 나는 전적으로 편의를 위해서 이 교수와 다른 한 박사가 합작으로 제작한 새로운 아동용 운동능력 발달 검사의 검사자 간 검사 정밀도 (reliability) 검정을 학사학위논문 주제로 삼았는데, 연구 내용이란 그저 손가락 운동 발달 정도를 검사하기 위해 애들이 지시에 따라 그려놓은 삼각형, 사각형, 원 따위를 철저히 검사 매뉴얼에 따라 채점한 후 채점 결과가 서로 독립적으로 채점한 두 평가자 사이에서 충분히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논문 얘기를 듣고 "심리학과인 줄 알았더니 체육학과였어?"라고 물었던 내 동생은 중요한 허점을 짚어낸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계량에 (그와 더불어 매뉴얼에의 철저한 충성에) 치중함으로써 얻은 것은 치밀한 눈금 재기요, 잃은 것은 심리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 자체다. 무슨 일이 발생한 건가? 과학 이데올로기에 잠식되어 눈금을 정확히 읽는데만 집중한 나머지 자기가 뭘 다뤄야 할지도 잘 모르게 된 것이다. 심리학에 있어서 이 현상은 정말로 드라마틱한데, 애초에 탐구 대상이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게 아니다 보니 과학 이데올로기에 잠식되어 정확한 측정을 부르짖는 동안 정신분석이나 심층심리학적 심리치료 분야를 제외한 심리학에 남은 것은 인지과학, 신경과학, 행동과학으로 충분히 환원될 수 있는 것들 뿐인 것처럼 보인다. 인지심리학, 신경심리학, 행동심리학이라고 말들이야 하지만, 그것들을 굳이 심리학으로 봐야 하는지, 그냥 인지학, 신경학, 행동학으로 환원해도 상관없지 않은지 따져 물으면 심리학은 스스로를 방어할 논리가 궁벽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심리학은 계량하기, 계량할 방법을 찾기에만 빠져드는 것 같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계량을 치밀하게 하는 것이 옳은 통찰과 판단을 보장하지는 않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고, 이것이 과학 이데올로기의 효과다. 계량의 치밀함은 관찰해야 할 바로 그것을 제대로 포착하여 관찰하는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인데, 정확한 계량의 과학적인 '이미지' 때문에 계량 자체에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계량 가능한 변수"라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다. 예를 들어보자면, 실제 있었던 사건으로, 어느 나라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마 영국 아니면 미국이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칼을 휘두르는 대신 사람들이랑 대화를 해서 그 사람들이 살인을 하게끔 유도하는 방식으로 수 건의 살인을 일으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심리학은 이 사람이 사용했던 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측정" 할 수 있을까? 측정은 불가능할 것이고, 제일 희망적인 방법은 그 사람이랑 대화를 해 보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도 아무나 한다고 해서 충분히 좋은 정보를 이끌어 낼 수 있진 않을 거다. 모종의 "탁월함"이나 "노련함" 같은 것이 필요할 텐데, 이런 영역은 수치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영역이지만 인간의 정신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내 생각에) 필수적이다.
심리상담의 영역은 어떨까? 계량화 하기 힘든 방법론인 정신분석 같은 것은 '과학화' 된 심리학의 영역에서 몰아내진 지 오래고, 그나마 다뤄지는 건 행동치료다. 왜냐하면 행동치료는 행동주의적 관점에 그 기초를 두고 있고, '행동' 은 측정하기 좋은 대상이기 때문에, '과학적' 심리학에 속할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이나 정신분석에서 파생된 심층심리상담 같은 것은 심리학에서 별로 다뤄지지 않는데, 내가 학부 1학년 때 방법론을 가르쳤던 교수는 "심리상담이라는 것은 과학이 아니고 그저 어떤 기술의 일종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마음'에 접근해 들어가려는 시도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퇴출되는 거다.
이건 임상심리학 교수가 얘기해준 자기 환자의 사례인데, 어떤 젊은 남자가 애인과 함께 부부(커플) 상담처를 찾아왔다. 이 사람은 발기 부전으로 성관계에 곤란을 겪고 있었다. 과학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계량적 접근을 해 보자면 평소 발기 횟수, 섭취하는 음식들은 어떤 건지, 어떤 신체적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피검사도 해 보고, 그런 것들이 우선적이겠지만, "파트너와의 섹스에 관해 떠오르는 것들을 얘기해 보세요"와 같은 접근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교수는 이 남자와 얘기해 보다가 남자가 자기는 덩치가 큰데 여자 친구는 너무 조그마해서 혹시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곳은 애기 머리가 빠져나올 수 있게 설계되었는데, 당신 거시기가 아무리 굵다한들 애 머리의 절반이나 되겠어요?"라고 설득한 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이런 접근은 계량적 관찰을 통해서 포착되지는 않지만 심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는 거다.
내가 본문 앞부분에 링크 건 글에서는 과학적 사회학과 참여적 사회학을 대비적으로 논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포지션을 취한다. 참여적 자세가 무엇을 함으로써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인가 하는 식의, 상황 안에 뛰어들어 뭔가를 하기 위해 고민한다면, 전자는 상황 밖에 서서 어떤 행동이 실제로 어떤 효과를 일으키는지 검사하는 데 중점을 둔다. 물론 두 가지 다 중요할 거다. 심리학에 옮겨 적용해 보자면, 소위 과학적이라고 하는 태도는 예컨대 어떤 심리치료가 적용되기 전, 그리고 적용된 후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측정하는 데 동원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대화를 나눌 것인지, 내담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각들이 그 내용적 차원에서 어떻게 구조 지어져 있는지를 논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내담자가 의식적으로는 지각하지 못하지만 내담자의 사고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무의식적 사고 같은 것은 전혀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데, 질문지가 생각 내용을 계량할 수 있는 허용된 방법의 마지노선이고 비계량적 방법까지 허용한다 쳐도 인터뷰가 끝인 마당에 "무의식적인" 사고에 대해 논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사고 과정이라는 게 있긴 있다는 건 이제와서는 "과학적" 입장에서도 인정하는 듯 하지만.
욕망과 충동, 상징계와 상상계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도입하는 심리학 이론은 그 이론이 논하는 대상을 온도계나 시험관, 질문지 같은 것으로 측량할 수 없고, 그래서 과학이 아니고, 과학이 아니어서 학문(진리 찾기)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어 심리학 담론의 장에서 퇴출되고 만다. 그런 이론들이 다루고 있었던 심리학의 영역은 상실된다.
눈에 보이게, 손에 잡히게 검정할 수 없다면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다루지 않는다, 이것이 과학주의/경험주의적 입장일 텐데, 나는 이 입장이 기본적으로 틀렸다고 보는 건 아니다. 이 입장은 이렇다 할 근거 제시 없이, 혹은 합당한 비판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고 배 째라는 식으로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 이론-썰이 지탱되는 그런 상황보다는 훨씬 바람직할 테니까. 그런 접근이 근본적으로 틀렸다거나 다른 방법론으로 완전히 대체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과학적인 것" 이 "진리"를 전부 포괄할 수는 없을 텐데 "과학적인 것"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들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쓸려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