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자식을 대도시로 보내려 했고, 서울 못 간 걸 실패로 여겼으니.
저는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에 속합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주변 사람들은 학생, 학부모, 친척, 학교 및 학원 교사를 막론하고 전부 다 서울대∙포항공대∙카이스트 가면 좋다, 못가면 연고대 가는 게 좋다, 그것도 못 가면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교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걸 위해 하루종일 전력으로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지방대에 가는 건 서울 소재 대학 진학에 실패한 결과였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거의 전 국민이 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심심하면 한 번씩 뉴스에 지방소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국민이 다 지방을 떠나 서울에, 한양 도성에 "입성" 하기를 기원하며 살았고, 그 소원이 어느정도 이뤄지니 당연한 귀결로 지방소멸이 다가왔다고.
여러 담론 속에서 지방소멸은 해결해야 할 문젯거리로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다른 얘기들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에 사람이 없어서 문제다, 조선소에 사람이 없어서 문제다, 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어서 문제다, 기타등등…. 사람이 없어서 문제라는 이 모든 곳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 곳에 자식 안 보내려고 기를 썼고, 자식들은 목표달성 (좋은 대학 입학) 에 실패하면 저런 곳으로 추락하게 되는 거라고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암묵적으로 배우면서 자랐지요.
하지만 저 모든 영역들은 우리 나라의 기둥뿌리였습니다. 제조업은 국가 산업의 근간이고, 조선사업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수준이었으며, 농업은 말할 것도 없이 국가 안보의 중대한 기반입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이런 영역들, 그리고 그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는 홀대했습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천대했습니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사람들을 천민 취급하는 사고방식이 전국민에게 팽배해 있었습니다. 스스로 그 "천민" 에 속하는 사람들 까지도 그런 사고방식을 공유했으며, 그래서 자기 자식들에게는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열심히 공부해서 귀한 사람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양반" 이 되라고 한 셈입니다.
하지만 사회 구조는 다들 양반이 될 수는 없게끔 짜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다양한 버전의 "과거시험" 이 치러졌고, 사람들은 줄세워져서 시험에 붙으면 양반이 되고 못 붙으면 천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시험의 목적은 사람들을 떨어트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과거시험" 에 급제하지 못한 이들에 대한 나쁜 취급은 달라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자기 자식이 과거에 급제해 양반이 되게 하는 데에 전력투구할 뿐이었습니다. 모두 천민 세계를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모두가 서로를 그런 노력에 힘쓰라고 독려했습니다. 이게 너무 당연했고, 다들 세상이란 원래 이게 본질인 것처럼 느끼면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양반들의 세계를 제외한 사회의 나머지 영역들, 천민들이 살아가는 영역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습니다. 여전히 그 영역들은 사회의 근간, 기둥뿌리였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었음에도 말입니다.
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된 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난했고, 다 같이 밑바닥에서 각자의 생활 기반을, 그리하여 총체적으로는 나라의 기반을 닦아 나가던 때에는 다들 처지가 비슷했고, "양반" 이 되지 못한 것은 다들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여겨졌지만, 어느정도 기반이 닦인 후에는 "양반" 이 되지 못한 것은 무능한 탓에, 또는 노력이 부족한 탓에 실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천민들, 실패자들에 대한 대우는 열악해도 상관 없는 것처럼 여겨지기가 보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노력을 안 해서 추락했을 뿐" 이었으니까요.
"양반" 이 되지 못한 이들, "실패" 한 이들은 중소기업으로, 비정규직으로, 지방으로 "추락" 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제대로 노력하지 않은 데 대한 처벌처럼 이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렇게 되뇌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안 해서 이렇게 된 것이니 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지."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불행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네가 노력하지 않은 탓인데 왜 불평불만이 많냐" 는 식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그런 야단치는 말들을 듣게 됩니다.
인구의 대다수가 귀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세상이 이어져 왔습니다. 서울대생은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중앙대나 서강대 학생은 그럭저럭 괜찮은 대접을 받습니다. 지방 거점 국립대 학생은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위치 정도에 있고, 그 이하로는 존중받지 못합니다. 대학 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의 전 영역에 이런 사고방식, 귀한 사람 천한 사람을 구분하는 사고방식이 뿌리깊게 박혀 있습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다들 "양반" 이 되려고 발버둥치며 삽니다. 처결은 상대평가로 이뤄지며, 국민 대다수는 양반이 못 됩니다. 실패자가 됩니다.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우리들은 긍정받으며 자라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심하면 취학 전부터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내돌려지며 영어를 잘해야 인정받고, 수학을 잘해야 인정받고, 그렇게 길러졌습니다. 사람이기만 하면 기본적으로 받는 인정과 사랑, 존중은 희박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일 년에 네 번씩 아주 단순한 숫자로, 100/350 같은 식으로, 350명 중에 100등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존중받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가 결정됐습니다. 1등은 아주 많은 사랑과 존중을 받을 사람이고 200등은 그에비해 훨씬 적은 존중과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우리의 존재 가치와 받는 사랑이 수량화되어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후의 사회에서 인정과 사랑은 무엇보다도 돈을 통해 받게 되고, 액수로 수량화되어 있지요.
공부를 잘 하지 못해도, 명문대생이 아니더라도, 즉, "양반" 이 아니더라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존중, 사람이기만 하면 무조건 받을 수 있는 존중, 인정, 사랑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날엔 많이 나아졌지만, 90년대, 2000년대 까지만 해도, 학생들을 무슨 캠프에 보내서 군인처럼 굴리는 일이 흔했는데, 이 군인 취급 또한 애초에 시민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군인을 인권이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게 상식이었고, 당연지사였습니다. 다시, 이 군인 취급 또한 한국 사회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뿌리를 두고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상하가 명확한 관계 형식 속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절대복종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인격체로 존중받을 권리를 갖지 않았습니다.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바로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였습니다. 법적 권리와는 별개로 말입니다. 교사는 학생을 마구잡이로 줘패도 됐고, 선임병은 후임병을 마음대로 때려도 되었고, 선배가 후배를 때려도 됐고, 상사가 부하에게 하대하고 욕하고 심지어 때려도 됐습니다.
그런 것들이 문화적으로 허용되고 있었고, 당연했습니다. 놀고싶어 하는 것이 애들의 자연적 본성일지라도, 아침부터 밤까지 학교와 학원에 보내져 맞아가며 공부케 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집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학원 교사들에게 우리 애 때려가면서 공부시켜 달라고 말하는 장본인들이었습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이 없었고, 이것이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상태가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상태라고 생각하지조차 않았습니다. 이렇듯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인정과 사랑, 존중 같은 것들이 희박했고, 사람들의 기질은 거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간에 서로 때리고 맞는 그런 세상 속에서, 덜 맞는 위치에 가려고 다들 애썼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돋는 듯 극도로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이상적인 얘길 하고 있느냐, 있는 그대로 사랑 받는 게 말이야 좋은 말이지 현실적으로 가능하느냐, 경쟁이 필수인 게 현실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였고, 이 세계를 수용하고, 이 세계 속에 적응해 들어가 살아야만 했습니다. 부적응자, 불평불만분자가 되는 것은 인정과 사랑을 잃어버리는 확정적인 길일 수밖에 없지요. 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그리하여 어느정도 적응해낸 이들에게 이 세계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란 아주 거슬리기 쉬울 것입니다. 이 세계에, 이 세계의 논리에 적응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참고 얼마나 열심히 견뎠는데! 이 세계의 문제를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힘들게 싸워 얻어낸 인정과 사랑을 공짜로 얻어가려는 괘씸한 인간으로 여겨집니다.
민족사관고 졸업생의 자서전인가, 그런 책에서 저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철들고 나서 엄마에게 왜 나를 때려서라도 공부시키지 않았느냐고 절규하며 울었다고요. 그리고는 절치부심하여 죽어라고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한국사회의 비극적 일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양반과 천민이 나뉘어 있으며, 사람은 모름지기 양반이 되어야 제대로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앞서 말했듯, 사람이면 일단 기본적으로 무조건 어느정도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그 기반 위에서 물욕이나 명예욕이 많은 편인 사람이 좀더 애쓰고 좀더 경쟁하는, 그런 형태라기 보다는, 무조건 받게되는 인정과 사랑이 희박하고, 그런 거 거의 없이 아주 밑바닥에서부터 남들보다 더 잘나야만 인정과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삽화적으로 말하자면, 많은 경우 부모에게조차 공부를 잘 해야 칭찬받고, 안 그러면 혼나거나 구타당합니다. 그렇다보니 인생의 상당히 초반부터 절실하게 한 줌의 인정과 사랑이라도 받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하지만 인정과 사랑은 상대평가의 결과에 따라 분배되고, 다수의 사람들은 인정과 사랑의 결핍 상태에,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자기애와 자존감 결여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구조가 절대적인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에 개인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선택 가능한 유일한 대응 방법이 경쟁에 참여하고 어느정도 승리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이 결론에 이르고 나면 왜 일찍부터 나를 때려서라도 이 대응 방법을 수행하게끔 강제하지 않았냐고 울부짖게 되는 것이지요.
한국 사회의 이런 면모는 사회의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개개인에게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여집니다. 학원에 앉아 성적 향상 전략을 귀기울여 듣고 있는 학생들은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게 그 학생이 살고 있는 당연한 현실이니까요. 지난 시험 때보다 떨어진 성적 때문에 부모님에게 혼날까봐 걱정하면서도 일반적으로는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진 않을 거고요. 그저 혼날 걱정에 머리가 꽉 차 있을 뿐이겠지요. 이런 경험이 쌓여 개인을 형성하고, 이런 개인들이 모여 사회가 됩니다. 개인이 사회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회 구조나 문화란 것은 무수한 개인들이 모여 상호작용하며 형성되는 것이지만, 몇몇 개인들이 모여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거나 하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사회 구조를,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문제시하는 이야기는 무력감만을 초래하기 쉬울 것이고, 사람들은 안 그래도 어려운 삶에 굳이 추가적인 무력감까지 느끼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폭발하고, 그 폭발로 인해 붕괴되거나 크게 흔들린 사회에서 새로운 구조가, 또는 크게 변화한 구조가 탄생하는 그런 흐름으로 변화를 얻는 게 아니라, 기존의 질서 속에서 변화를 이루려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사회 구조에 대해 의식을 갖고 있고, 또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할 겁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사회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겠지요. 어쩌면 오늘날 크게 떨어진 출생율도 비폭력적인 방식의 극단적 변화 방향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이어지는 극도로 낮은 출생율은 향후 한국 사회에 강한 충격과 변화 압력을 가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래는 이 글을 다른 사이트에 올렸을 때 달렸던 댓글입니다.
천부인권이 없는 나라임 ㅋㅋ
농담처럼 했지만, 진지한 이야기인게, 너님 글에 잘 설명해놨다만, 인간사회에서 인간은 성과로서 존중받는 부분과 본질적으로 존중받는 부분이 혼재되어 있고, 이 둘 사이의 구성방식이 해당사회의 문화이자 특징의 중요한 단면이랄 수 있다. 사회 과정에서 상호관계를 통해 해당사회마다 구성원들간에 저 두가지 존중을 어떻게 맞춰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과 양식을 구성해나가는거임. 그런데, 한국의 문제는 일제지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독특한 양식이라고 할 만한게 크게 형해화되어버렸고, 그걸 새로 구성해나가야 했는데, 그 말인즉슨, 해당 사회 나름의 "존중" 에 대한 감각이란게 형해화되어버렸다보니, 오직 성과만이 남아버린 사회가 되었고, 그게 문제가 되는 거임.
서양의 천부인권이란 개념은 서양 것이긴 하지만, 이를테면 한국에서도 인내천 같은 형식으로, 동아 사회 특유의 천명개념을 자체화한 개념은 있긴 하지. 그런 식으로 어느 사회든 구성원들에게 "최소한의 존중" 이란 걸 다양한 양상으로 제공하는거지. 그러나, 지금와서 단군숭배의 사회적 형태랄만한 대종교 같은게 사회에 머선 영향력이 있음? 최소한의 존중이라는, 인간사회라면 어디서든 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은 단지 있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냥 존재하는게 아님. 해당사회의 구성원들이 "구성" 해 나가는거지. 그리고, 그게 파괴된 게 한국이고, 그게 없으니, 존중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오직 실질적인 성과에 대한 집착만이 남아 이 사회의 현대를 관통해왔고, 이제 저성장 시대에 들어서 성과가 근본적으로 나올 수 없게 된 시점이 되자, 그 동안의 달콤한 성과때문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보편적 존중이라는 것이, 구성원들의 숨을 막히게 하기 시작한 게, 지금 시점인거지.
까놓고 말하면 구성원들에 대한 기본적 존중의 제공이란 것의 정치이념적 표현이 평등인 거임. 그러나, 한국인은 평등을 막연한 추상으로서만 여긴채 현대 70년을 보내왔고, 그걸 구체적으로 하려고 하자니, 그 동안의 좋게 말해 자유(사실 군사정권 시절 생각하면 자유도 아니다만), 까놓고 말해 경쟁을 통해 구성되어온 사회를 크게 바꾸어야 한다는 것에 큰 불안을 느끼는 거. 존중하자고 하면 그러자! 하면서도 그걸 사회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평등을 내세우자! 하면 니 뻘개이가? 소리가 튀어나오는 모순이 이래서 나오는 거임. 아예 이게 모순인 줄도 몰러 ㅋㅋ 난 이 나라에 오만 환멸을 다 느끼고 있기 때문에, 망해봐라~ 라는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임. 어디 한번 잘들 해 봐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