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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 May 18. 2023

모르는 자로서의 자아

장르 만화를 통해 보는 자아의 처지

본문에 나오는 자아라는 개념은 프로이트가 그의 구조모형 (또는 심급모형) 에서 제안한 자아 (das Ich), 초자아 (das Über-Ich), 그것 (das Es; 이드, 원초아) 이라는 세 요소들 중 하나인 자아입니다. 자아는 의식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요소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초자아나 그것에 비해서는 무의식적인 면이 가장 적은 요소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흔히 순정만화라고 부르는, 오늘날 쇠퇴해 가고 있는 여성향 장르의 만화는 주로 어린 여성을 독자로 겨냥하고 만들어지는 만화였습니다.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독자인 어린 여성들이 스스로를 이입하기 쉬운 십 대 여성이고, 장르의 핵심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는 요소는 남자 주인공의 존재, 그리고 성적인 관계 (연애) 입니다.


순정만화와 그 소비에 있어서 앎과 모름의 상황을 봅시다. 만화의 작가뿐만 아니라 독자들 역시 만화 초반에 등장하는 멋진 남자가 주인공 여자와 연애하게 되리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 멋진 남자 주인공은 독자의 마음에 드는, 잘 생기고 유능한 그런 남자입니다. 즉, 욕망의 대상이지요.


만화 「궁」 1권의 표지

이미지 출처


그 연애 대상임이 뻔한 남자 캐릭터가 이미 표지에 떡 하니 그려져 있는 것도 통상적인 일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작품 내의 인물, 여자 주인공에게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모르는 자"입니다. 통상적으로 작품 초반에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싫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수 없는 남주"는 익숙한 연출이지 않습니까? (물론 이런 전개는 만화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자와 독자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결국 독자 일동이 욕망하는 이 남주와 주인공 사이에 성적 관계가 성사될 것임을요. 이미 그렇게 되기로 다 짜여 있는 각본 속에서 주인공만 모릅니다.


순정만화에서는 주인공에게 "이 멋진 남자와 연애하게 된다"는 사실이 은폐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태로 그걸 즐깁니다. 장르 문화의 특성은 독자들이 그 장르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를 이미 어느 정도 선에서는 예상을 하고 접근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장르의 소비자들은 그 "장르의 문법"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범죄스릴러 장르에서는 살인이 일어난다는 걸 독자들이 알고, 독자들은 바로 그걸 즐기기 위해 돈을 지불합니다. 순정만화에서는 그 즐김 대상이 매력 넘치는 남자와의 연애인 것이지요. 물론 재미있는 스토리도 꼭 필요할 거고요.


하렘물이라고 불리는 남성향 만화 장르에서는 주로 어린 남성들이 독자로 노려집니다. 주인공은 독자들이 스스로를 이입하기 쉬울만한 십 대 남성이고, 이 남성 주변에 여자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 장르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들은 젊은 남성 주인공, 그리고 다수의 여성 인물들과 그들의 몸이 노출되는 장면들입니다.


「마법선생 네기마!」 1권의 표지

이미지 출처 


저자와 독자는 이 장르에서 재미있는 스토리 외에도 빠질 수 없는 즐김의 대상이 여러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의 (시각적) 존재 자체, 여성 캐릭터들이 주인공에게 보이는 호의적인 태도 (물론 이 호의는 성적인 호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체 노출 장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독자의 욕망의 대상인 거지요. 하지만 주인공은 이런 욕망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컨대, 주인공이 실수로 여자 캐릭터들이 있는 목욕탕이나 온천 같은 데에 들어가게 되면 독자들이 기대하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장면은 이 장르의 소비자들 사이에서 서비스컷이라는 용어로 지칭되곤 하는데, 이 용어는 이것이 바로 독자들이 원하는 것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은 여자 캐릭터의 알몸을 보려고 일부러 여탕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저 사고로, 실수로 그런 일이 벌어질 뿐입니다.


왜 독자들은 다 아는데 주인공은 모를까요? 이 모름은 사회적 금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물론 욕망을 긍정하는 사고방식이 점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이런 풍속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기는 합니다.)


여성의 욕망의 경우, 예컨대 돈 많은 남성을 원하는 태도는 현실에서 속물적인 것으로 비난받곤 합니다. 여성향 작품 속에는 갑부 남자 주인공이 흔히 등장하지만, 여자 주인공은 결코 속물적으로 돈 때문에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처음엔 싫어하는 경우가 많지요. 또, 현실 속에서 여성들이 "저는 외모 안 봐요"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것도 사회적 금기와 연관돼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작품 속 남자 주인공은 반드시 미남입니다.


남성의 욕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십 대 중후반에 접어들면 남자들끼리 있을 때에는 성적 욕망을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확연히 줄어들지만, 더 어릴 때에는 확연히 성적 욕망, 그에 앞서 성적 호기심을 숨겨야 할 일로 느끼는 감각이 일반적입니다. 십 대 중후반, 그리고 이십 대에 이르러서도 남녀가 섞여 있는 경우 남성의 성적 욕망은 노골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모종의 사회적 금기, 또는 그런 감각이 분명히 있습니다.

남성향 작품 속에서 남자 주인공은 이런 금기를 해치지 않습니다. 그런 "못된 생각" 같은 건 "모릅니다".


주로 어린 나이대를 소비자층으로 하는 순정만화, 남성향 만화는 이런 금기를 건드리지 않는 안전함 속에서, 다시 말해 독자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긴장시키지 않으면서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즐길 수 있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 대체로 저마다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개성적인 방식에 따라 마음속 욕망이 충족될 수 있게, 그리고 동시에 사회의 금기와 공존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안전장치는 덜 필요하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저런 장르 문화는 다소 유치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지요. 그러나 어른이 되어도 모든 것들이 의식화 되는 건 아닙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 속에 모종의 검열 기제가 있어서, 검열을 통과한 심적 요소들만이 의식 영역에 들어올 수 있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무의식 영역으로 추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장르 만화의 주인공들이 독자들이 속해있는 나이대의 사회에서 대체로 금지된 것으로 취급되는 것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작품 속 주인공이 아는 것은 금기에 걸리지 않는 것들 만으로 한정되는 것이죠.


장르 만화들 속에서, "모르는 자"인 주인공의 처지는 자아, 더 정확히 말해서 의식된 차원에 있는 자아가 처한 상황과 유사성이 있어 보입니다. 의식은 그 정의에 따라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심적 내용들에 대해 모릅니다. 만화 속 주인공이 "모르는" 것 처럼, 우리 의식-자아도 "모릅니다". 작품 속 인물은 모르는 것들을 작품 바깥의 작가와 독자는 알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의식적 자아인 "나"가 모르는 여러가지 것들이 의식 밖, 무의식에 들어있지요.


작중 인물의 이야기가 작가와 독자는 알고 있는 무언가에 따라 (예컨대 장르의 문법에 따라) 흘러가듯, 우리의 이야기-인생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의식 세계에 있는 미지의 내용물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고 있다고 말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각양각색으로 살아가는데, 자기가 왜 그렇게 사는지, 왜 삶을 그 많은 다양한 방식들 중에 하필이면 본인이 겪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경험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여러가지 그럴듯한 가설들을 가지고 있을 순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가설들이지요.


장르 만화라는 영역에서 앎과 모름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개별 사람의 정신 속에서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차원에 걸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은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며 사방을 더듬어 나가는 암중모색의 작업입니다.


이 모름에 관심이 가는 분에겐 제 다른 글 "나도 모르는 나의 부분들"도 흥미로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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