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버를 찬양합니다.
라스트맨 스탠딩 Last man standing
오늘 아침, 이상하다. 흐읍, 숨을 들이킨다. 이 느낌을 안다. 온몸의 세포들이 물을 먹고 있다. 마치 화병 속의 오아시스가 물을 끌어모아 빵빵해진 것처럼. 벽에 걸린 달력을 앞뒤로 넘겨보니 20일이 훨씬 지났다. 3주일 넘게 운동장을 안 갔다. 달리기를 안 했다. 체중계에 올라가 본다. 3kg가 쪘다. 그러면 그렇지, 뺄 때에는 모르겠더니 운동을 쉬면 몸이 귀신같이 알고 살을 붙인다.
달리기를 알게 된 건 2008년,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뉴욕에 있는 학교에 진학한 때였다. 원래의 전공을 바꿔 새로운 분야의 공부를 하는 때였는데 출국을 하기 전까지 주변 사람들의 만류가 많았다. 경영학과를 나와 패션 쪽으로 진로를 튼다는 게 다소 뜬금없다는 직언, 지금 있는 곳에서 커리어를 디벨롭하는 게 훨씬 낫지 않겠냐는 조언, 지금 네가 보기에는 IT업계는 손에 잡히는 게 없어 보이겠지만 한 곳에서 우직하게 버티면 또 다른 장이 열릴 거라는 충고들을 등뒤로 한 채 떠난 길이었다. ‘세계에서 제일 바쁜 도시에서 새로 도전한다’는 그 한 줄에 고취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날도 밤새워 과제를 하고 난 이른 아침이었다. 여명이 지나가 밝아진 도로를 따라 센트럴파크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전에 가보지 않았던 호수 쪽으로 길을 틀었는데, 우연히 본 광경에 아연실색해졌다. 꽤 넓은 호수둘레를 수많은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발구름을 하면서 몸이 공중에 떴다가 바닥에 닿는 모양들이 마치 물결 같았다. 달리는 방향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하필 역방향으로 걷다가 자꾸 마주치는 사람들 때문에 민망해져서 그들처럼 방향을 바꿔 걷기 시작했다. 뚱뚱한 사람 날씬한 사람 가리지 않고 뛰고 있었다. 걸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다 뛰었다. 마치 탑돌이처럼, 저 호수에 무슨 염원이 있는지, 빠르든 느리든 저마다의 속도로 뛰어갔다. 저들은 무얼 바라며 저렇게 달리는 걸까, 이상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뛰고 있다는 데에 묘한 쇼크를 받았다. 나는 운동복 차림도 아니었고, 러닝화를 신지도 않았지만, 호수를 거진 한 바퀴 다 돌았을 때엔 나도 반쯤은 뛰고 있었다. 안 뛰면 안 될 것 같았다.
당시 미국은 [America Runs on Dunkin]이라는 슬로건의 던킨도너츠 광고캠페인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었다. 그날 아침의 광경은 ‘던킨을 연료 삼아 미국이 움직인다’는 광고의 원래 뉘앙스가 아니라, 진짜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호숫가를 뛰고 있는 듯했다. 센트럴파크에서 빠져나와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도넛과 베이글을 입에 물고 길거리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땐 그 느낌에 확신이 생겼다. 땀 흘리고 베이글에 커피 마시면 더 맛있겠네, 이러면서 입맛을 다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날부터 나도 뛰어봤다. 타향살이의 우울감을 지우는 데는 운동이 최고였고,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이 Good girl 말해주면 칭찬받는 느낌에 자기 효능감도 올라가는 것 같았다. 기록도 오르고 체력도 오르고 기분도 올랐다. 신나는 음악과 함께 뛰다 보면 어느샌가 오는 고양감에 만족도도 올라갔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러닝은 잊고 살았는데, 코로나 기간 동안 살이 너무 많이 찌고 건강도 안 좋아지니 러닝 생각이 다시 났다. 다시 러닝을 시작하던 날, 1km 뛰는데 10분 넘게 걸리면서도 숨이 깔딱깔딱 넘어갔는데 3-4개월 정도 거의 매일 뛰니 5분 후반대까지는 기록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러닝 반바지 때문에 허벅지 중간 밑으로는 새까맣게 타고 팔뚝은 얼룩덜룩 타서 우스꽝스러웠지만 수련의 훈장이라 생각하니 이것도 좋았다.
그런데, 복병이 있었다. 바로 나 자신이 꾸준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진득이 자기 제어를 하는 것이 너무 힘든 그런 사람이라는 거다. 한 계절의 끝이 보이자 슬슬 나태해지더니 날씨가 쌀쌀해진다는 이유로 뜸해지기 시작했다. 1kg을 감량하면 페이스 10초는 쉽게 단축되는 걸 뻔히 알면서도 2킬로를 뺐다가 다시 3킬로를 찌우는 식의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겨울이 지나가니 기록은 다시 8분대로 훅 떨어져 버렸다.
무언가를 처음 하면 남들보다는 빨리 어느 선에 이르지만 꾸준하지 못해서 전체적으로 보면 큰 성장이 없다는 점은 항상 내 마음속 채무처럼 남아있었다. 달리기 뿐만이 아니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무언가를 하겠다던 결심, 에세이를 꾸준히 써보겠다던 생각, 영상이나 사진을 찍어보자던 계획 역시 큰 진행이 안되고 중간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어정쩡한 재능이나 어정쩡한 성취는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마흔쯤 살아보니 너무나 잘 알겠다. 잘 달리는 토끼보다 지치지 않는 거북이를 사람들은 더 칭찬하고, 우직함이라는 단어는 적당한 성취보다 훨씬 추앙받는 듯하다. 신입 때 좀 벗고 이제 좀 똘똘하니 쓸만해졌는데 벌써 그만두냐던 회사 선배의 말이, 십수 년이 지나서야 뼈가 아리듯 따갑게 와닿는다.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아. 생각하지 말고 그 시간에 그냥 해. “
내 고민을 들은 C는 피식 웃으며 저렇게 일갈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내 의지박약을 이렇게 박살을 낸다. 꾸준하기 위해 생각을 없애란다. 뇌를 잠깐 빼놓고 몸을 움직이면 된단다. 고도의 뇌작용이 필요한 글쓰기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되겠지만 달리기에는 일단 도움이 될 것 같다.
“버틴 놈이 강한 거야. 꾸준한 놈이 남는 거고. 그 뭐냐, 애들 말하는 [존버]. ”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말인가 싶지만 이 또한 쉬지 않는 거북이에 대한 또 다른 레토릭이겠거니 싶다.
서둘러 짐을 챙겨 헬스장으로 향한다. 스트레칭을 하고 트레드밀에 올라선다. 잠깐의 워밍업 걷기 이후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하는데, 역시나. 속력이 안 나고 숨이 찬다. 올 11월에 JTBC 10킬로 마라톤을 신청해 놨는데, 한 이십일 좀 쉬었다고 되던 게 안된다. 마라톤 신청을 하던 날, 6개월 이상이나 남은 마라톤대회를 위해 한 달에 얼마씩 속력을 단축하겠노라 세웠던 계획은 다 무산되었다. 그래, 계획을 세우지 말고 일단 뛰어야겠다. 오늘도 뛰고, 내일도 뛰고, 좌우지간 그냥 뛰어야겠다. 애들 말처럼 존버는 승리한다니까. 라스트맨 스탠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