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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나 Aug 16. 2019

내 죽음의 엑시트는 어디에?

죽음을 죽음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

출처: 영화 <엑시트>

산악 동아리 실력이 이런 곳에서 쓰일 것이라 생각했을까? 영화 <엑시트>는 유독가스 테러에서 암벽등반을 하며 탈출하는 코미디 영화이다. 주인공 용남(조정석)은 산악 동아리 에이스였다. 그는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오직 탈출구인 굳게 닫힌 옥상을 향해 로프 끈을 잡았다. 암벽등반으로 탈출 현실 가능성 없어 보였다. 스파이더맨처럼 무한 공급되는 거미줄이나 (무한 공급되나...?) 고탄력 점프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암벽등반으로 탈출이라... 웃긴 부분도 많았지만, 사실 난 스릴러를 보는 듯 떨렸다. 고층, 비교적 연약해 보이는 끈 (믿을 수 없는 끈),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도전. 아찔한 높이, 보는 내내 심장이 오그라들고 현기증이 나는 듯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난 높은 을 싫어한다. 내 몸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상황은 최대한 피한다. 높은 건물 밖 경치 구경을 위해 창문 근처를 가거나, 등산 후 절벽 근처를 가거나, 혹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은 매우 드물다. 어릴 때 뉴질랜드 타우포에서 번지점프를 하던 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무엇이 두려운 걸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의 저자 샐리 티스데일은 비행기를 타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두려움은 각박한 현실의 통한 두려움과 죽음이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고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p. 42). 나의 높은 곳에 대한 두려움 또한 '죽음'이사실 높은 곳 자체에서 받는 현기증도 있지만, 그것보다 높은 곳에서 죽으면 내 신체가 훼손될까 봐 걱정된다.


책 <죽음에 대해 떠든다고 죽진 않는다> 저자 버지니아 모리스는 말했다.

상당수는 부검으로 신체가 훼손될 봐 두려워한다. 어떤 이는 죽어 갈 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가족에게 버리 받을까 봐 두려워하며, 다른 이는 추한 모습으로 죽을까 봐 두려워한다 (p. 43).


신체가 훼손되면 나의 훼손된 시체를 보아야 할 가족들의 아픔이 두렵다. 해외 생활을 할 때는 절대로 '밖'에서 죽으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군인들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 받여 파병 온 것도 아닌데 내가 해외에서 죽으면 내 시체를 어떻게 이송하지?라는 생각들이 있었다.


나에게 위험한 상황은 '높은 곳' 외에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중이염이나 대상포진에 걸려 응급실을 들락날락하거나, 자동차 문제로 0 도에서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겨울 고속도로 위에서 손 발이 얼어 죽을 뻔한 사건, 블랙아이스 (black ice)에 미끄러져 자동차가 빙글빙글 그리고 내 마음까지 빙글빙글 돌아버린 사건들. 혹은 타인에 의해 총 사건, 테러사건, 혹은 살인사건 등 예측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 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죽고 싶을까? 좋은 죽음?

미국 연방정부 규정에 의하면 좋은 죽음이란 "환자와 가족과 돌보는 사람이 피할 수 있는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환자와 가족의 바람에 전체적으로 조화되며, 임상적. 문화적. 윤리적 기준에도 상당히 부합되는 것"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63


이것이 정말 좋은 죽음일까? 영화는 어떨까? 봐도 봐도 다시 보고 싶은 타이타닉의 명장면이다.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잭과 로즈는 가까스로 나무판을 찾았으나 두 명 다 빠질 위험에 로즈만 올라간다. 추운 바닷속에 나무판에 매달린 잭은 결국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용기 있게 사는 로즈. 잭의 죽음은 좋은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화 <타이타닉>, <노트북>


영화 <노트북>처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건 어떨까? <노트북>을 보고 실제로 영화 같은 죽음을 맞이한 커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사랑했으면"이라는 마음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없는 깊은 사랑과 그들의 죽음은 꼭 연방정부의 규정처럼 "고통 없이 평안하고 차분하게" 죽는 좋은 죽음처럼 비추어진다.


샐리 티스데일은 좋은 죽음이란 "죽어가는 사람이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라고 말한다. 타인이 결정, 마음, 바람에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락사는 좋은 죽음인가? 안락사도 '죽음을 위한 방법'이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여겨질 수 있을까?

안락사: 회복의 가망이 없는 중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켜 사망케 하는 의료행위. 안사술·존엄사. [개설] 안락사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정치/법제 > 법제/행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벨기에를 포함한 비교적 많은 국가에서 안락사를 허용한다. 인간 안락사 관련 다큐멘터리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앤드 게임: 생이 끝나갈 때> (예고편) 통해 안락사는 허용하는 국가에서도 찬반의 의견 논란은 끊임없음을 알 수 있다.


불치병은 어떨까? 버지니아 모리스는 말한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서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낼 때, 우리는 '플러그를 뽑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죽을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과도한 기술가 침습적 치료에서 환자를 '해방시켜주는 것'입니다. 죽을 자유를 주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돌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 174



죽어감과 죽음을 '계획'할 때? 무엇이 먼저일까?

계획과 실천을 좋아하는 나에게 없는 계획이 있다. '죽음 계획서'이다. 얼마 전 인생 계획서를 쓰면서 나의 3년, 5년, 10년 등 내가 인생에서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계획들로 '체계적'으로 썼다. 그러나, 그 계획 속엔 '죽음'은 없었다. 죽을 뻔한 경험들은 그 순간만 나에게 삶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일깨워 주었지만, 나에게 죽음이 다가올 것이라는 상상은 여전히 '영화'속에서만 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p.47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죽음에 대한 저항, 좋은 죽음, 죽어감,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상세히 알려준다. 부록 부분에는 죽음 계획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장기와 조직 기증, 그리고 조력사까지 다양한 방법을 알려준다. 죽음을 막연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인지하면 달라질까?


영화 <버킷리스트>에서 이들은 죽기 전 죽음을 '받아들인 듯' '안 받아들인 듯', 두 남자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리스트,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실천하며 생을 마감한다. 본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생을 마감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영화 <버킷리스트>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마치면서도 여전히 나는 '좋은 죽음'이라는 단어에 얽매이고,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이고 싶으며, 최대한 건강하게 살아야지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라는 생각들이 가득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과 고통, 죽어감을 지켜보는 시간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들은 여전히 두렵다. 이 책은 죽음에 관련된 과정을 상세히 알려준다. 정답은 아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음, 죽어감, 죽어가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단순히 언젠가 만나는 '죽음'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임을 배웠다. 부록에 나와 있는 죽음 계획서,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장기와 조직 기증, 그리고 조력사 고용까지, 이 부분을 작성한다고 죽음이 '더' 괜찮아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행위들이 나의 죽음의 '엑시트'가 아니다. 그러나 필요한 과정이다. 죽음을 '완성'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죽음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쌓아가는' 것도 괜찮다. 바위 하나씩 올라가자.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샐리 티스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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