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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카피 Dec 16. 2022

열이 식는다는 것

제주 종달리에서 닷새 살기


  30년 직장생활을 꽉 채웠으니 이 정도는 쉴 자격이 있을 것 같다며 두 달 제주살이 하러간 선배가, "너도 내려와서 좀 쉬다 갈래?" 하는 순간, 아, 같은 학교 같은 과를 같은 날 졸업하고 같이 광고계로 들어온 나도 광고회사 생활 30년을 채운 거구나- 떠올리게 되었다.


  예정에 없이 불쑥, 여름에 쓰지 못한 휴가 대체로 휴가를 내고 선배가 살고 있는 제주 구좌읍 종달리로 내려가 닷새를 살고 왔다.


  섬의 겨울은 육지인인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스산했고, 트렌디한 관광지로 알고 있던 종달리는 아무리 비수기라지만 단 1cm 만큼도 관광지 같지 않은 모습으로 조용하고 쓸쓸했다.


  여행했다-가 아니라 살고 왔다-고 쓴 건, 말 그대로 그곳에서 '살다 왔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선배가 마을 뒤편 작은 오름인 지미봉에 오르러 나가면 나는 텅 빈 마을을 혼자 걸으며 사진을 찍고, 오픈 시간 따위 아랑곳 하지 않게 제 마음대로 문을 여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옛 소금밭 터에 자리잡은 책방에서 책을 읽었다. 점심에 둘이 만나 동네 한 켠 함바집이나 뚝배기 파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근처를 둘러보고, 저녁엔 다시 둘이 밥을 먹고, 숙소에 마련된 블루투스 스피커로 실컷 음악을 들으며 잠들 때까지 또 책을 읽었다.


  첫날, 밥과 커피 먹으러 들어간 가게에서 만난 여자 사장님에게 선배가 두 달 묵으러 왔다고 인사하며 "머리 좀 식히려구요" 하자 서울에서 부부가 같이 내려왔다는 우리 또래의 사장님이 담담히 웃으며 "10년 살아도 안 식더라구요" 했다. 


  식힐 열이 있다는 건, 사실 좋은 것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소년처럼 예쁘게 달아오르진 못하지만, 30년째 식지 않는 열이란 또 그것대로 가치 있는 것 아닐까.




  제주에서 돌아와, 오랜 오디오 취미의 마지막 편린이라 할 인티 앰프와 CDP, 스피커들을 장터에서 모두 처분했다. 12년 전 고양이들과 살기 시작하며 전까지 모은 좋은 기기들을 다 팔고, 최소한의 소박한 기기만 남겼다고 생각한 그 기기들이다. 안그래도 요 몇 년 계속 고민만 하고 결정을 못 내리던 일인데, 종달리 작은 에어비앤비 숙소의 마샬제 블루투스 스피커가 스캔스픽과 스카닝의 고오-급 유닛들이 들어간 거실의 내 스피커보다 수십배 더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주는구나- 체감하게 되니 더이상 실행을 미룰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틀 사이에 기기들을 다 팔았고, 늘 그렇듯 광속에 가까운 실행력으로 블루투스 연결 기반의 값싼 액티브 스피커를 구입했다. 오랜 내 허영심을 생각하면 인클로져 크기가 작기도 참 작아 혼자 싱긋 웃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4.5인치 우퍼라니!


  기기 파는 얘기를 들은 친구가, 세월이 담긴 좋은 기기들 다 팔아치우고 유행을 좇는 값싼 물건들을 들이면 나이 들어 더 초라해질 것이다, 그걸 회복할 여력도 없을 것이다- 라고 걱정해 준다. 무슨 말인지 알기에 쉽게 반박할 수 없으나, 내린 결정을 되돌리긴 싫어서 "로또 맞으면 XX씨가 좋은 스피커 하나 사주시겠죠" 하고 말았다.




  식히지 말아야 할 열을 스스로 잃는 짓을 한 건지도 모른다. 기껏 힘들게 지켜오던 걸 또 하나 잃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를 믿는다면, 너무 슬픈 전망에만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뭐 어때" 하고 돌아설 아무 것도 아닌 일일 터. 그러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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