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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Oct 19. 2023

부모의 80대를 이해하기

내 아버지의 오래된 시골집에 가면 아버지가 보물처럼 애지중지하는 병풍이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시골집을 수리하다 발견한 할머니의 유품이다. 할머니의 병풍은 내 키보다 조금 낮아서 가슴을 가릴 정도의 높이인데, 다 펼치면 8폭의 각각 다른 그림을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그림으로 보이지만 수를 놓은 것이다. 수가 놓인 장면은 우리가 흔히 들어본 적 있는 내용으로, 그네를 타고 있는 춘향이와 그 모습을 쳐다보는 이몽룡의 모습 같은 평범한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하지만, 요새는 보기 어려운 물건에 속하기 때문에 시골집에 갈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병풍을 흥미롭게 관찰하곤 했다. 그 병풍은 할머니의 환갑 일에 아버지가 선물하신 것이라고 한다. 할머니의 성대한 환갑잔치를 오래된 사진첩에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병풍이 아버지에게 소중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병풍 뒷면을 마감해 놓은 종이는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아버지는 객지 생활을 하면서 할머니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다 모아서 병풍을 제작해 선물하신 모양이다. 그 옛날에도 지금에도 찾아보기 어려운 효자 아들이라고 진심으로 인정한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52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할머니가 80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애석하다는 말씀을 과장하면 백 번쯤 하신 것 같다. 몇 가지의 노인성 질병을 겪으면서도 내 아버지는 80을 무난히 넘기고 잘 살고 계신다.



이제는 환갑잔치라는 말이 어색해진 시대가 되었다지만 아버지가 60세이던 때만 해도 여전히 환갑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생일이었다. 할머니만큼 성대한 환갑잔치는 아니었어도 자식들과 뜻깊은 60세를 기념했다. 70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내가 이제 살날이 얼마나 남았겠냐‘며 친지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10년을 잘 보내고 재작년 80세 생일을 맞아 70세 생일 때와 비슷하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주제로 일장 연설을 하셨다. 부모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것은 좋으면서도 힘들다. 언젠가는 그리워질 날이 온다는 아버지의 잔소리는 해를 거듭할수록 길어지고, 고집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부모님을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나는 부모님의 어떤 요구와 기대까지 부응해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일까‘를 생각한다.



유난히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노년의 부모는 힘겹다. 그들이 중년일 때 생각했던 노년의 삶은 이게 아니었을 것이다. 결혼한 자식과 손자, 손녀들이 한 집에 모여 북적거리며 사는 노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유구히 흘러온 가족의 규범과 가치가 변할 것이라는 의심은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의 생각보다 빨리 변했다. 버릇없어 보이는 후손에게, 변해가는 가치관에 노여워하는 노년은 늘어났다. 또한 자식, 손자 세대들과 생각의 차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다.



중년을 지나는 자식은 노년의 부모와 성인이 된 자녀 사이에서 힘겹다. 더 정확하게는 어릴 때 배운 가족의 규범과 현재의 변화한 규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삶을 살아내느라 피곤하다. 중년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지만 중년의 자식은 여전히 노년의 부모를 걱정한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는 삶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노인의 지혜를 배워야 할 후손이 줄어드는 사회는 비극적이다.



노년의 부모와 자식이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은 정해져 있다.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원하는 것을 해주면 된다. 아이와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과 정확히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가 요구하는 것이 아이에게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부모가 판단해서 결정할 수 있지만, 노부모의 요구는 거절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나라에서 오랫동안 관습으로 굳어온 ‘효‘의 의무는 종종 부모와 자식의 진심을 담은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내 엄마는 올해 팔순을 기념하여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해외여행을 하고 싶어 한다. 호기심이 많고 여행을 좋아하는 분이니 팔순 생일맞이 선물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고령과 예측하기 어려운 노인의 건강을 고려하여 가까운 나라에 자식과 동행하는 자유여행을 하자고 제안하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정해놓은 여행지가 있었고, 그곳은 내가 여행하기에도 난이도가 높은 나라이다. 동갑 친구가 지난해에 다녀온 나라이니 본인도 충분히 갈 만하다고 확신하고 있기에 나의 제안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명확하고 고집은 세졌으니, 자식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제야말로 자기의 삶에 완벽하게 충실하다고나 할까… 내 부모뿐 아니라 팔순을 맞는 많은 노년은 그렇다. 마치 자연의 섭리처럼 삶이 반복된다는 느낌이다. 노년의 삶 속에 세상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이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든지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와는 반대로 80대의 노인은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내가 아버지를 관대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모님을 만나기만 하면 여전히 지적질이 한가득이다.



‘자기의 삶에 충실한 모습이 이기적으로 비치지 않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포장하지 않고도 자기의 욕구를 잘 표현할 방법이 무엇일까’는 중년의 나에게 중요한 숙제이다. 80대를 보내고 있는 내 부모와 남은 시간을 불통으로 채우다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과, 다가올 나의 노년은 이 숙제가 해결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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