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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Oct 23. 2023

자유롭게 입는 즐거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나의 옷차림은 주로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굽이 있는 구두를 신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여대생이라는 표시라도 하듯 어깨에는 핸드백을 메었으며 손에는 두어 권의 책을 들고 가슴팍에 밀착하여 다녔다. 나만 그런 옷차림을 한 것이 아니라 내 친구들도 비슷했다. 가끔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기도 했는데 체육대회나 MT 같은 행사가 있을 때였다. 대학교 2학년 내내 나는 주름치마를 입고 다녔다. 내가 좋아했던 선배가 주름치마 입는 여학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는 말해도 괜찮을 듯싶은 나의 흑역사 중 한 페이지이다. 리본 달린 블라우스도 주름치마도 내가 좋아하는 옷은 아니었다. 굽이 높은 구두도 신을 때마다 불편했다. 주름치마를 벗어 던진 후 대학 생활에서 청바지와 운동화는 나의 교복이 되었다. 나는 교복을 입고 온갖 데를 자유롭게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직장을 다니던 무렵, 대학생들은 배꼽티와 헐렁한 힙합 스타일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는 것으로 젊음을 표현했다. 이런 옷차림이 젊음의 상징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었다. 나는 직장에 다녔으므로 대학생이 누리는 옷차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 홍대 입구에서 직장이 있었던 양재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다녔는데 환승역인 을지로3가역은 갈아타는 거리가 유난히 멀었다. 나는 매일 구두를 신고 환승역을 뛰다시피 하며 지하철을 이용하여 출근했다.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지내다 집에 오면 발이 아팠다. 왜 운동화를 신고 다닐 생각을 못 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멋진 양복 차림의 남자가 배낭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뉴욕의 지하철역을 나와 활기차게 걷다가 자기 사무실에서 구두로 갈아신는 모습을 텔레비전 광고에서 보았다. 지금은 별거 아닌 장면이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광고 속의 남자보다 더 멋진 남자를 실제로 목격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였다. 양복을 입고 여전히 등에는 배낭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어떤 남자가 손에 도시락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부터 이렇게 멋지고 자유로웠나 싶었다. 미국에 좋지도 싫지도 않은 마음이었던 내가 살짝 호감으로 돌아서는 순간이 있었다면 바로 이때였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옷을 입거나 신발을 신지 않는구나…’, ‘자기가 먹을 점심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성인 남자도 있구나…’



미국에서 살았던 9년 동안 나는 세탁소에 가지 않았다. 내 옷은 모두 물빨래가 가능한 실용적인 옷들이었고, 신발은 운동화와 슬리퍼만 신었다. 무슨 일을 해도 어디를 가도 불편한 일은 없었다. 우리나라에 돌아온 후 입을만한 옷이 한 개도 없었다. 처음 1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옷을 사고 신발을 샀다. 예전처럼 치마를 많이 입지 않아도 되었지만, 구두는 다시 신어야 했다. 자유로움이 사라졌다. 



매일 아침 나는 맨투맨 상의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한다. 산책하다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예외가 아니다. 간혹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의 옷차림도 나와 다르지 않다. 맨투맨 상의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고 배낭 대신 큼지막한 에코백을 들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연한 듯 운동화를 신은 사람이 많다. 그 옛날 내가 신기하게 바라보았던 양복 차림에 운동화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옷차림이다. 손에 도시락 가방만 들면 내가 흠모해 마지않던 멋진 남자의 착장이 될 것 같다.



청바지와 운동화는 여전히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좋지만, 이제는 나이 든 사람도 자연스럽게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는다. 요새는 트레이닝 바지와 운동화가 더 인기 있는 옷차림 조합으로 보이기도 한다. 청바지와 운동화는 오랫동안 젊음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으나 사실은 입고 싶은 옷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움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나는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삶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불편했다. 을지로3가역을 더 빨리 뛰고 싶었지만 구두를 신고는 불가능했던 이유도 있다. 운동화를 신고 뛰었다면 지각하지 않으려고 조마조마했던 마음에서도 조금 더 자유로웠을 것 같다. 나이에 상관없이 자기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편한 옷차림으로 갈 수 있는 장소가 많아진 이 시대를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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