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부터 필라테스를 하고 있다. 필라테스는 레깅스를 입는다는 것을 몰라서 처음 몇 번은 헐렁한 트레이닝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갔다. 나처럼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날씬한 사람들만 필라테스를 하라고 누가 정해주기라도 한 듯 나처럼 살이 적당히(?) 올록볼록한 사람도 별로 없다. 날씬한 몸을 자랑하기 위해 몸에 딱 붙는 레깅스와 티셔츠를 입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호흡을 정확하게 하고 있는지 강사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별수 없이 나이 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혐오한다는 레깅스를 나도 주문했다.
강사가 추천한 쇼핑몰을 뒤적이다 보니 한 개 값으로 두 개를 주는 상품이 있었다. 집에 도착한 레깅스는 검은색과 보라색이었다. 나는 보라색을 주문한 적이 없다. 나는 검은색과 어두운 회색 두 개를 선택했는데 보라색이라니… 레깅스를 입는 것도 고역인데, 내가 이렇게 눈에 확 띄는 보라색 레깅스를 주문할 리가 없다. 쇼핑몰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상품교환을 위해 전화를 하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의 주문내역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으니, 이제는 우기지 말라’는 남편의 조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나는 쇼핑몰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색깔의 레깅스 중에서 블랙과 다크 그레이를 선택했었다. 하지만 내 주문은 블랙과 다크 그레이프였다. 나는 선택지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주문한 것이다. 하마터면 고객센터에 항의전화해서 내 말이 맞다고 우기는 진상 중년여성이 될 뻔했다. 내 기억은 항상 틀릴 수 있다. 몇 번이나 속으로 되새기지만, 상황이 닥치면 일단 내가 잘못할 리 없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먼저 든다. 뭐든지 일단 본인 말이 맞다고 우기고 보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도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인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 유연한 사고를 하고 싶은 것이 중년기를 지나고 있는 나의 소망 중 하나인데 이토록 작은 일 하나에도 내 기억이 맞다고 우선 생각한다. 나는 사리 판단이 분명한 사람이 아니다. 나보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은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선생은 우리 삶 어디에나 고수가 있다(人生到處有上手)는 말을 했었다. 내 중년에 가장 필요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