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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pcicle Dec 07. 2023

자식은 인생의 훈장?

너무 오래전이라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김수현 작가가 쓴 드라마에 나오는 할아버지가 자식을 이름 대신 ‘지점장’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불렀던 장면이 기억난다. 둘째 아들이 은행의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이상하여 드라마 작가의 정신세계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데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직장에서 부르는 직함을 사용하다니 요즘 애들 언어로 하자면, ‘작가가 도랏구나… 말이 되냐고, 집이 회사도 아니고…’ 이런 마음이었다. 물론 요즘은 이런 설정의 드라마는 찾아보기 어렵다. 시대가 바뀌었다.


그러나, 직함을 이름 대신 부르는 어른은 우리 집안에 지금도 존재한다. 시아버지는 자식과 며느리 사위를 직함을 이용해 부를 때가 많다. “*이사 이제 왔냐”, “*약사야 밥 먹었냐?” 등등. 나는 들을 때마다 낯이 간지럽지만 이 집안의 분위기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작년 이맘때 자식들이 부모님 댁에 가서 김장을 거들었더니 시아버지께서는 ‘*부장과 *박사, *피디’가 같이 만든 김치라 더 맛있다고 하시며 한껏 기분 좋은 내색을 하셨었다. 오글거려 죽을 뻔 한 사람은 나뿐인가 싶었다.


나는 이렇게 직업에서 얻어지는 명칭을 이용해 자식을 부르는 습관을 지니고 계신 시부모님이 아직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든 이후로는 이해하려고 애쓰는 편이다. 시부모님은 빠듯한 생활 속에서도 자식 넷을 쓸만하게 키웠다는 자부심이 가득해서 자식의 직업은 본인들의 인생 업적이 되고 말았다. 오래전 내가 보고 어이없다고 생각했던 드라마를 쓴 김수현 작가는 노인들의 이런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대본을 쓴 것이 틀림없다. 죽을힘을 다해 자식을 가르치고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자식이 부모 인생에서 최대의 업적이며 면류관일 수 있음을 작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 지는 중요하지 않다.


부모님이 부를만한 변변한(?) 직함을 갖지 못하고 살고 있는 자식은 괜히 위축되지 않을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은 머릿속 복잡한 나만 하는 걱정이다. 공개적인 자부심의 대상으로 뽑히지 못한 자식의 마음도 헤아리는 아량을 가진 보통의 부모가 이 세상에는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보았던 ‘엄마가 바퀴벌레로 변했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어떤 아이가 한 대답이 걸작이었다., “휴~ 어쩌겠어, 반찬통에 넣어서 내가 그냥 같이 살아야지.” 엄마의 모습이 아니지만 그래도 내 엄마이기 때문에 내다 버리지 못하고 같이 살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효용가치가 아닌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하는 멋진 꼬맹이였다.


내 아이는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평생 내가 지어준 이름으로만 아이를 부르고 싶다. 자식이 인생의 훈장이던 시대는 이제 다 지나갔으니 나는 부모님 세대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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