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일상이 반복되던 아침은 한통의 카톡으로 특별한 날이 되었다.
사춘기시절을 함께 했던 여중학교 동창의 카톡이었다.
성격 좋은 J는 우리 무리에서 친했던 P의 딸이 결혼한다고 다 같이 모이자는 내용을 전했다.
그동안 연락을 못해 직접 연락하기가 미안하다며 P를 대신해 J가 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친구 딸의 청첩장을 보내왔다.
삼십 년 가까이 연락이 없다가 자식의 청첩장을 보내온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 꼰대가 된 것인지 이런 소식은 직접 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엊그제 서로들 결혼식을 찾아다녔는데 '벌써 자식들 청첩장이 오네 싶어' 반갑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그건 예의가 아니지!'하고 애 먼 소리를 했을 테다.
하지만 곧 '나도 연락 안 하고 살았으니 똑같아'
생각하며 기차를 예매하고 입고 갈 옷을 고르고 있었다.
이십 대에 우리 중에는 제일 먼저 시집을 갔던 P였다.
그동안 무심하게 서로들 잘 살겠거니 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 그 시절이 많이 그리웠었나 보다.
우리는 읍내의 여자중학교에서 제법 잘 나가는 일곱 명의 여학생이었다.
'써니' 영화의 빛나던 청춘들처럼 우리도 우정과 의리로 똘똘 뭉친 그런 여자아이들이었다.
반백의 나이가 되고 보니 가장 찬란했던 인생의 한 장면이 그 시절 우리들이었다.
사춘기를 별 어려움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친구들과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이문세의 별밤을 함께 들었고, 첫 부임해 온 체육선생님을 같이 좋아했고, 수학선생님도 짝사랑했던 우리들,
청소를 안하고 떡볶이를 먹으러 달아났던 일,
춘향전에 나오는 어사가의 일부를 달달 외게 했던 국어선생님 이야기,
우리는 커피숍에서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를 지금도 외우며 주입식 교육의 장점을 칭송하였다.
친구딸의 결혼식이 끝나고 찻집에 앉아 어느새 우리는 수다스러운 여중생들로 돌아가 있었다.
프로골퍼로 생활체육인이 된 J,
숲해설사로 그림책작가가 된 P,
전교회장을 도맡아 했던 리더십 짱 Y,
국제결혼을 해서 말레이시아에서 못 왔지만 늘 전교 1등 도맡아 했던 보고 싶은 S,
늦은 결혼으로 중2 딸의 엄마 M,
여전히 방부제 미모 골드미스 내 친구 H,
그리고 나,
우리의 모임의 이름이 북두칠성이었다는 것을 차 한잔을 하면서 기억해 냈다.
"우리 학교에 북두칠성 말고, 또 다섯 손가락 다섯 명 있었던 거 너네 기억나?"
"다섯 손가락?",
"응, 오지라고 있었어."
"그랬구나, 그래도 우리가 더 유명했지? 꺄르르르"
그래, 우린 그렇게 우리의 십 대에 작은 일에도 크게 웃고, 행복했고,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아이들이었지.
그리고 인생의 숙제를 어느 정도 해 낸 것 같은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빛나는 별처럼 잘 살아내고 있는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내 친구들.
앞으로는 우리 더 자주 만나자 이야기하며 서로를 안아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익은 단풍이 가을을 재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