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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ony Nov 28. 2023

분홍색이 보이면 비상이야

화장실 청소에 대한 집착의 근원을 찾아서

기본적으로 물속성인 나는 집안일도 물과 관련된 걸 좋아한다. 가장 일상적인 집안일 중에서는 설거지 담당이긴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집안일은 화장실 청소다.


레스토랑 알바를 할 때도 가장 정성 들여했던 마감이 화장실 청소였다. 조금은 지저분한 상태로 들어가도, 깔끔하고 깨끗해져 나올 수 있는 곳. 가장 지저분할 수 있는 곳이 깨끗한 만큼 그 집이 깨끗해 보인달까.


다른 집에 가더라도 화장실 관리 상태가 계속 신경 쓰이는데, 특히 분홍색 물때가 보이면 마음 한편이 답답해지기 시작한다. 좀 많이 친한 친구의 집이라면, 답답한 김에 화장실 청소를 해주고 오기까지 한다.


기본적으로 청소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화장실 청소에만 유독 신경 쓰는 걸 보고 혹자는 집착 수준이라고 했다.


어디서 온 걸까, 이런 집착은?

한동안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다른 청소는 그렇게 하기 싫어하면서, 왜 하필 화장실만?

생각해 보니, 내가 살아온 집들은 언제나 곰팡이가 잘 생기는 집이었다. 혹은 화장실이 깨끗할 수 없는 집이었다.


아주 어릴 적,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살던 집은,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와우산 중턱의 판잣집이었는데 집 안에 화장실이 없었다. 말 그대로 판자촌이어서 화장실은 근처 여러 집이 같이 사용하는 공용 화장실을 써야 했고, 샤워는 부엌 한켠 수돗가에서 해야 했다.

 (야외는 아니었다. 어떤 구조인지 상상이 안 가신다면 응답하라 1998 덕선이네 집 부엌/수돗가​를 생각하시면 된다.)

특히 겨울밤이면, 그 추운데 집 밖으로 나가 화장실 가는 게 너무 싫고 무서웠다.


중학생 즈음부터 살던 집은 화장실이 있긴 한데, 대문 안쪽, 그렇지만 현관문 밖에 있었다. 집 안에도 욕실이 따로 있었기는 했지만, 집안 욕실은 변기가 없어서 말 그대로 씻는 것만 가능했다. 허리를 다 펴고 설 수도 없었던 욕실이었다. 작은 창이 있었지만, 습기가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물도 하수구를 통해 바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닥 철판 아래 어딘가에 물이 차있다가 양수기가 웽-하면서 주기적으로 퍼올려 버리는 식이었다. 씻기 위해서는 현관 밖으로 나가 추위를 견디며 바깥화장실+욕실을 가거나, 허리가 펴지지 않는 집안 욕실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독립을 하기 직전,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살던 집은 다행히 화장실이 집 안에, 현관 안에 있었는데, 이 집은 반지하였다. 화장실에 곰팡이가 그렇게 필수가 없었다. 이틀에 한번 청소하지 않으면 걸레 썩는 냄새와 함께 수돗가에는 분홍색물때, 타일과 줄눈에는 검은색 곰팡이가 생겨있었다.

그 냄새와 광경이 너무 싫었다. 엄마 아부지도 예전에 비해 감각이 무뎌지셔서 그런지 나만큼 곰팡이에 예민하시지는 않았다.

결국, 화장실 청소는 그걸 볼 때마다 열받아 있던 내가 하게 되었다.


나의 화장실 청소 루틴은 이렇다.

샴푸, 치약/칫솔, 클렌징폼 등 선반과 벽의 잡동사니를 대야에 모두 담는다. 그리곤, 줄눈을 따라 젤타입 곰팡이 제거제를 바른다.


선반과 타일, 세면대, 수전에는 곰팡이제거용 옥시크린을 뿌리고 옥시크린이 작용할 때까지 옥시크린을 칙 한 번만 뿌린 수세미로 변기 뚜껑부터 변기 도기 안쪽까지 구석구석 닦아낸다(물 나오는 구멍 바로 옆이 제일 곰팡이가 잘 생기니 꼼꼼히 닦자)

여기까지 했으면 1차 준비 완료.

이제는 청소 솔이 역할 할 차례다. 가장 큰 넓은 솔로 타일과 선반, 세면대를 마구 닦아내고, 줄눈용 솔로 줄눈을 한 번씩 훑는다. 여기까지 하고, 옥시크린 묻힌 스펀지로 거울도 닦는다.

거품칠을 모두 끝냈으면 이제 찬물세례. 뜨거운 물은 락스와 닿으면 유독할 수 있으니 찬물로. 마무리로는 마른걸레로 거울과 변기, 벽면을 모두 닦아내고, 바닥 타일은 스크래퍼로 물을 밀어낸다. 마지막으로 수챗구멍 머리카락까지 버리면 끝!


지금 사는 집은 반지하도 아니고, 화장실도 집에 있고, 창문도 있고, 곰팡이도 예전만큼은 생기지 않지만 아직도 화장실 청소만큼은 주기적으로 챙기는 편이다.


분홍색 물때를 보면 그 반지하 집들이 생각난다.

비상이다. 그때로 돌아가는 느낌이야. 돌아가지 않겠어. 그때로.


그래 어쩜, 화장실 청소는 그래서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깨끗함 그 자체보단, 내 심사가 혼란하기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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