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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예 Aug 04. 2023

어린날의 나에게

우정, 별거 없더라.

어릴 때의 나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나서기 좋아했고, 승부욕도 강했고, 목소리도 커서 주의를 받기도 했다. 극 'E' 성향이었던 내가, 지금의 대문자 'I'가 될 때까지 여러 에피소드가 있었겠지만, 어린 나이에 가장 충격적으로 남은 기억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몇 년 동안 가장 친하던 '크루'가 있었다. 나를 포함해 4명. 우리는 늘 점심을 함께 먹고, 쉬는 시간마다 같은 장소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학교는 물론 주말에도, 우리는 함께였고, 당시 우리의 소통 창구였던 MSN메신저 공개사진도 늘, 같이 찍은 셀카였다. 나는 그 우정이 대단한 우정이라 믿었다. 가족만큼 소중하다 생각했고, 대학교를 가고 결혼을 해도 우리의 미래는 비슷한 결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난 날, 평소와 다른 기운이 흘렀다. 나를 제외한 세명의 친구는 뭔가 나에게 숨기는 듯했고, 내가 괜찮냐고 물어도 말을 흐리며 셋이 수군거렸다. 소외당하는 일, 소위말해 '아싸'가 되는 게 끔찍이도 싫었던 나는, 그렇게 초조함에 갇혀 지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우린 여전히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지만, 모든 대화에 나의 자리는 없었다. 알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고, 혼자 울기만 할 뿐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드디어 친구들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얘기 좀 해."


아직도 기억난다, 그 장소. 압구정로데오 커피빈 2층. 하교 후 모인 우리 넷에게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분명히 느꼈다. 셋의 눈빛교환, 무언가를 작정한 듯 한 분위기. 나는 이유를 모른 채 죄인이 되었다. 마침내 한 친구가 말을 꺼냈다. 자기들 셋은 지난 시간 동안 나에게 너무 상처를 받았다고. 내가 나의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서, 본인들의 얘기는 듣지 않는다고. 이기적인 내 모습을 고치라고. 그렇게 봇물이 터지듯, 약 한 시간 동안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세 명이 나에게 받은 상처 목록을 들었다. 


"미안해..."


사실 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사과 말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에게 상처를 받았다니, 나는 가해자겠지. 나는 그저, 그들이 나의 말을 듣는 걸 재미있어하는 줄 알았을 뿐인데. 악의는 전혀 없었는데. 친구인 줄 알아서 더 나를 보여줬던 건데, 내가 보기 싫었구나. 나는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기적이구나. 마치 커다란 쓰나미처럼, 나는 처음으로 자책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때 잘못 배운 자책이 습관이 되어, 여태 self-hate으로 이어져온 게, 참으로 안타깝다.


지금의 내가, 당시의 나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상대방에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은 대인관계에서 정말 중요해. 너의 얘기에 더 심취해 있는 네 모습이 친구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나 보다. 하지만, 그걸 알고 반성하고 고치려 노력했잖니? 그리고 친구들에게 다시 다가갔지만, 그들은 등을 돌렸지. 남의 이야기를 더 잘 들으려 노력하기, 사람과 사람의 교감에 더 유연해지기. 이 사건으로 네가 배웠어야 하는 건 이 두 가지가 전부야. 자책하는 법, 스스로를 죽여 남을 살리는 법은 필요하지 않았어. 어쩌면, 너의 친구들이 틀렸을 수도 있어. 누군가는 너에게 상처받지 않고 넘어갔을 수도 있어. 너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수 있어. 너는 없고, 남으로 가득한 너. 수용적인 너. 그러기에 넌 너무 아깝잖니? 너를 너무 미워하지 마."


안타까운 건, 그 당시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는 이는 없었다. 마음이 건강한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다. 그래서 나는 지금처럼 마음이 아픈 사람이 되었다. 참 어렵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 


당시 그 세명의 친구들은, 여전히 연락은 하지만 자주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만큼 더 중요한 것들이 생겼으니까. 영원할 듯하던 그 우정도 결국, 옅어지는 순리를 따랐으니까. 지금은 모두 각자 당시 그들의 미래를 상상했을 때는 절대 그릴 수 없는, 그런 모습들로 살아간다.


너무나 클리셰 하지만, 말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 것들. 그런 일들이 우연히 삶의 터닝포인트가 될 때가 있다. 나에게 이 사건이 그랬듯이. 그 터닝포인트가 긍정적 영향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살아갈 때 양 옆, 앞 뒤로 에어백이 달려있으면 좋겠다. 여기저기 얻어터져도 작은 타박상정도로 끝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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