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취향이 장르 Sep 04. 2020

 너의 정체성을 내가 선택해도 되는 것일까

반려견의 변화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에 대하여_

"아이의 모든 행동이 성적 행동으로 보이네요~"


검둥이가 친구들과 뛰어노는 모습을 약 5분간 관찰하던 훈련사님이 말씀하셨다. 1년 2개월이 갓 지난 우리의 아기 검둥이는 5분가량의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강아지들에게 줄곧 무례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검둥이는 블랙 라브라도 리트리버다. 골든 리트리버보다는 좀 더 과격하다 표현할 수 있는 라브라도. 그중에서도 인절미 색깔의 아이들보다 좀 더 활동적이라는 평이 있는 까만색 라브라도 리트리버다.

검둥이는 아직 중성화를 하지 않았다. 중성화에 대한 의견은 매우 다양해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이 나와 남편의 생각이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언젠간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검둥이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중성화에 대한 조언도 많이 구해왔다. 대형견의 성장에 남성호르몬이 영향을 미친다는 의견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성장이 어느 정도 될 때까지 기다려왔다. 그저 우리 부부의 선택이었다. 괜찮다면,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지켜주고 싶었다.


검둥이와 함께 교육을 다니면서 훈련사가 강아지 중성화를 권유하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전문가나 훈련사는 중성화에 대해 절대적으로 하라, 하지 말라는 의견을 피력할 수는 없지만 행동에 이유가 있다면 권유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훈련사가 조심스레 중성화를 권유한 아이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다른 강아지의 의사는 무시한 채 무례한 행동을 계속해대는 것. 놀자는 표현의 행위가 아니라 성적인 행위로 다가가 올라타거나, 우위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습. 

그런 아이들을 만날 때면 검둥이는 늘 밑에 깔리거나 치이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고 줄곧 같이 뛰어놀았다. 그러다 도저히 상대 강아지의 과격함이 멈추지 않으면 어딘가 밑으로 숨어 들어가 빼꼼 쳐다보는 태도를 취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훈련사는 겁이 나서 숨는 것이 아니라 '거절을 부드럽게 할 줄 아는 괜찮은 강아지'라고 표현했다. 그 날 이후로 우리 검둥이는 마냥 천진난만하고 매너 좋은 강아지로 알려졌다. 



그랬던 검둥이가 언젠가부터 이상한 행동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산책을 하다가 마주친 다른 강아지에게 hackle up이 되어(등에 털이 서는 행동, 화가 났거나 힘을 과시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 나타남) 왕! 하고 크게 한 번 짖을 때가 있었다.(검둥이는 평소에 짖지를 않아 목소리를 들은 지 오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떤 강아지들은 슬쩍 쳐다보기만 하고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강아지에겐 시선을 고정하고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온 몸을 흔들어댔다. 이유는 마찬가지로 알 수 없었다.

검둥이의 행동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각기 다른 행동을 취하는 이유를 알아내고자 했다. 상대 강아지의 몸집 차이나 견종에 따라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대중이 없었다. 내 눈으로는 도저히 원인적 요소의 차이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산책 중에 다른 강아지를 마주쳤다. 세 가지 중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몰라 검둥이를 데리고 반대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검둥이는 땅에 엉덩이를 꼭 붙이고 앉아서 '저 친구와 반드시! 반드시 인사를 하고야 말겠어!!'라는 의사를 온몸으로 마구마구 표출했다. 끙끙거리고, 버티고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침 그 친구도 검둥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고민을 하다가 멀리 떨어진 채로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고 "인사를 해도 될까요?" 라며 의사를 묻길래 그러자고 했다. (아이들의 의사 또한 같았다고 보였다.)

둘은 마치 자석처럼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더니 착 달라붙어서 코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놈의 검둥이가 갑자기, 정말 순식간에 그 친구의 생식기로 얼굴을 들이밀어 버렸다! 이럴 수가. 아주 무례했다. 당연히 그 친구는 싫다는 표현을 하며 으르렁댔다. 나는 황급히 검둥이를 끌어내고 죄송하다 사과하고, 보호자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돌아섰다. 돌아서는 와중에도 검둥이는 끙끙거리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분위기 파악이란 걸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호르몬 냄새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 친구가 암컷의 발정기였을 수도 있잖아?"

아 이런,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나는 그저 검둥이가 아직 어려서, 다른 강아지들의 시그널을 파악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간 세 가지로 나뉘었던 행동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의 눈으로 그 차이를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실상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정말 호르몬에 의한 냄새의 차이가 원인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전문가인 우리의 생각과 예측에 그쳤기에 확신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검둥이와 함께 다른 강아지들과 뛰어놀며 행동을 파악하는 수업에 참여했다. 그리고 훈련사에게 그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아이의 모든 행동이 성적 행동으로 보이네요~"

말 그대로 검둥이는 다른 친구에게 턱을 괴고, 올라타려고 눈치를 보고, 중성화를 하지 않은 여자아이만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싫다는 표현을 약하게 하는 여자 아이들의 시그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계속 치근덕거렸다. 그간 봐왔던, 중성화를 권유받았던 무례한 강아지들의 행동을 우리 검둥이가 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훈련사님과 검둥이의 행동을 지켜보며 상태를 파악했다. 종합해 보니 검둥이는 현재 남성호르몬이 행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중성화를 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생기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보통 1년 정도가 그 시기인 것은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마냥 아기 같았던 검둥이가, 내 눈엔 아직도 철부지 꼬맹이 같은 검둥이가 어느새 남성호르몬을 뿜어내고 있다니... 순둥순둥한 눈으로 날 바라보지만 정작 다른 강아지에겐 무례한 행동을 취하는 이 아이의 모습에서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아, 내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구나. ' 하는 마음에 숙연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남편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둘 다 고민이 깊어졌다. 침묵이 흘렀다. 지나온 검둥이의 행동들과 앞으로 생길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해 보았다. 우리가 주로 활동하는 곳과 거주하는 곳의 환경적 요인, 앞으로 부딪힐 일상과 여차하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하여. 그리고 결정을 했다. 곧 수술을 하는 게 좋겠구나..



결정을 내리고 난 후 검둥이를 보는데 괜스레 눈물이 났다. 미안한 마음이었을까. 내가 과연 너의 정체성을 선택해도 되는 것일까. 어쩌면, 매너 좋고 귀엽기만 하던 이전의 모습과 달라진 검둥이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르는 변수가 걱정이 된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1년이 지난 시간을 함께 해왔다는 가족애였을까. 매일같이 발뒤꿈치를 앙앙 물며 쫓아다니던 뽀시래기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서, 항상 내 눈엔 아기 같고 꼬맹이 같은 검둥이가 언제 이렇게 자라서 남자가(진정한 수컷이?)되었나 싶은 생각에 울컥한 것이었을까.. 


이 모든 감정이 복합적으로 다가온 듯했다. 마음이 아프면서도 뭉클했다. 묘하게 이중적인 마음이었다. 마음으로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지켜주고 싶지만 머리로는 수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이중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나 자신에 대한 괴로움의 눈물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을 테다.

조용히 한참을 울었다. 울다가 문득, 내가 이 상황을 스스로 무겁게 느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어렵게 결정을 내려놓고, 그 결정을 이렇게 무겁게 느끼면 어쩌란 말인가. 눈물을 스윽 닦고,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나 내 눈엔 작은 아가, 꼬맹이인 검둥이의 '진짜' 아가 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