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이디어와 더 좋은 아이디어만 있을 뿐이다
나에겐 질문 노트 말고도 또 하나의 특별한 노트가 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바로바로 메모해두는 비밀 노트다. 회사에서는 광고주의 요구 사항에 맞춰 아이디어를 짜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비밀 노트를 채울 때는 정반대다.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끄적거리다가 잘 맞는 브랜드를 연결하는 식이다. 광고주 영입부터 기획, 제작에 이르기까지 비밀 노트라는 나만의 광고대행사 안에서는 원하는 모든 게 이루어진다.
최근에는 방향제 광고로 쓸 만한 크리에이티브 시놉시스가 하나 떠올라 비밀 노트에 적어두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문구에서 딱 한 글자만 바꿨더니 재미있는 포인트가 살았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제야!”
이렇게 조언해주는 윗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실제라면 다소 황당할 만한 일상의 에피소드와 방향제 광고를 연결해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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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회사 옥상.
심각한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오간다.
“선배님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선배가 후배에게 조언하듯이 말을 건넨다.
“이 대리,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제야.”
살짝 어이없어하는 후배에게 선배가 조언을 이어간다.
“넌 너의 인생에서 어떤 향기로 남고 싶니?”
능청스럽게 방향제를 쓱 들어 올리더니 공중에 촥 뿌리는 선배.
향에 만족한 듯 눈을 지그시 감는 후배의 모습 위로 떠오르는 방향제 제품과 로고.
이런 식으로 틈틈이 끄적인 아이디어의 흔적이 비밀 노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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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하얀 거탑>의 주제곡 <B Rossette>가 비장하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남자 주인공이 장엄하게 두 손을 서서히 위로 든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아내와 눈빛을 교환하는 남편.
아내는 남편의 양손에 장엄하게 주방용 고무장갑을 수술 장갑인 양 착 끼운다.
설거지를 시작하는 남편. 그 모습 뒤로 떠오르는 고무장갑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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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머리를 휘날리며 등장하는 훈남.
그가 머리를 한번 휙 넘기는 순간 반짝이는 오라aura가 그를 더 돋보이게 한다.
알고 보니 오라의 정체는 그의 머리에서 나온 하얀 비듬.
― 비듬 샴푸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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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가게에서 이 옷 저 옷을 둘러보는 젊은 대학생. 그 뒤로 주인이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건다.
“학생, 한번 입어봐. 딱 봐도 학생 옷이네. 내가 차비는 빼줄게. 진짜 나 손해 보고 파는 거야.”
4만 원이라고 쓰여 있는 가격표. 옷을 강매하듯 내미는 주인.
“차비 빼서 3만 8,000원에 줄게!”
당황하다가 이내 차분해진 표정의 학생.
“제가 부산에서 왔거든요. 기차비가 4만 8,800원. 옷값이 4만 원이니까 음…. 사장님이 8,800원만 주시면 되겠네요. 원래 왕복으로 다 받아야 하는데 제가 올라온 차비는 빼드릴게요. 저 진짜 손해 많이 보고 사는 거예요.”
당황하는 주인 위로 속을 뚫어줄 듯한 탄산음료의 기포가 몽글몽글 촥 올라온다.
옷 가게를 나서며 시원하게 탄산음료를 마시는 학생.
브랜드 로고와 함께 끝나는 탄산음료 광고.
옷 가게 사장님들의 흔한 영업 멘트 “손해 보고 판다”는 말을 그대로 사장님에게 돌려주며 시원하게 한 방 먹이는 학생을 생각했다. ‘속이 시원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사이다다”라는 멘트를 탄산음료 광고에 접목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 것이다.
지금은 쇼핑, 금융, 커피, 치즈, 가전 등의 광고주를 맡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새로운 품목과 광고주를 담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만든 광고를 보면서 장단점을 파악해보고 ‘나라면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만들어볼 텐데’ 하며 신나게 아이디어를 펼쳐본다.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뭐 하나라도 걸리겠지? 드넓은 바다에 통발을 치는 심정으로 비밀 노트를 채워나간다.
그러다 정말 통발에 대어가 걸린 적이 있다.
작년 연일 미세먼지가 뉴스에 오르내리며 관련 가전제품 주가도 최고조로 올랐을 때였다. 미세먼지 탓에 옷 세탁도 자주해야 하고 세탁소에 바치는 세탁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집에서 쉽게 옷을 관리할 수 있는 의류청정기에 관심이 갔다.
실제로 제품을 구매하려고 인터넷에서 정보도 검색해보고 후기도 꼼꼼히 체크했다. 백화점에 가서 직접 제품도 작동해보았다. 당연히 의류청정기 광고들도 찾아보았다. 그러다 또 직업병이 도져서 만일 의류청정기 광고를 만든다면 제품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적으로 낯선 가전제품이다 보니 소비자들이 기능에 공감해야 판매로 이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비밀 노트에 메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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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류청정기 안에서 바람이 먼지를 어떻게 없애주는지 속속들이 리얼하게 보여줘서 소비자들이 깨끗함을 느끼게하자.
메모를 남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운명처럼 삼성전자를 담당하는 기획팀에서 연락이 왔다. 삼성전자에서 의류청정기를 새로 출시하는데 신규 광고 캠페인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토록 타이밍이 절묘할 수가.
그렇게 우리 팀은 삼성전자의 신제품 ‘에어드레서’ 광고를 준비했고 3개월 후 무사히 광고를 온에어했다. 운 좋게도 본질에 충실하게 접근했던 비밀 노트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광고가 만들어졌다. 나는 우리 팀에서 광고한 제품을 구매해서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
하루 동안 얼마만큼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생각해본다. 머리를 폼으로 달고 다니는 건 아닌지 매일매일 냉정하게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온몸으로 생각해야 온전한 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나쁜 아이디어는 없다.
좋은 아이디어와 더 좋은 아이디어만 있을 뿐이다.
"이 책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하우만을 담지는 않았다. 묵묵히 하다 보니 단련으로 이어진 나의 일상과 생각을 한자 한 자 써나갔고 꾸준히 쓰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되었을 따름이다. 오직 크리에이티브만을 향한 발악을 진솔하게 담았으니 나름 건질 만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습관은 평범하지만 과정은 평범하지 않았던 나날들의 진심이 투명하게 전해진다면 더없이 좋겠다. 아무쪼록 재미나게 읽어주길 바란다."
- 오롯이 혼자 되는 새벽녘에 이채훈(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에이티브는 단련된다』 읽어보기 http://bit.ly/2PmcaG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