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오빠의 결혼식 뒷풀이 자리에서 P를 처음 본 날, 다른 것보다도 그의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머리 양 옆은 바짝 두피가 보일 정도로 짧고 앞머리는 (훗날에야 알았지만) 포마드로 정갈하게 올린. 그 옆에는 칼로 잰 듯 의식적으로 날 선 가르마. 인간미 넘치는 투박한 외모와는 다르게, 뭔가 수트를 잘 차려입은 얇상한 이탈리아 남자 같던 헤어스타일이 재미있었다. ‘오, 이 사람 생각보다 확고한 미학적 취향이 있나. 뭘 좀 아는 사람이려나.’ 싶었달까.
사실 난 취했었고, 그런 탓에 그 모든게 흥미로웠다. 며칠 후 P에게 재치 있는 선톡이 온 것을 계기로 두어번 정도 소주를 나눠 마시고 그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로 했다.
P는 가끔 나와는 종족이 다른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다. 머리숱도 그렇다. 조금만 정리를 안해도 머리카락이 중구난방으로 자란다. 그래서 첫 데이트날, 압구정에서 매운 오징어볶음을 먹으며 영화 ‘트롤’에 나오는 브랜치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유치하지만 순전히 자유분방 뻗치는 머리 때문에. 좀처럼 일반 미용실에서 감당키란 버거운 모질 탓에 P는 결코 아무데서나 머리를 하는 법이 없다. 취향이 뚜렷하달까, 까탈스럽달까. 확실히 그 둘 다이고 그러므로 P는 늘 가는 바버샵만 다닌다.
연일 격무에 시달려 점점 P의 머리가 B가 되어가기에, 토요일 아침 8시도 전에 단골 바버샵에 들렀다. 연륜이 깊으신 중년 사장님께서 운영하시는 곳인데, 아주 인기가 많은 곳이라 아침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한시간은 족히 기다리기 십상이다.
간만에 들어선 바버샵에는 어항이 있었다. 원래 있었나, 지난 3년 반동안 나도 너댓번은 온 것 같은데 바버샵 내부를 찬찬히 쓸어보는 건 처음인 일이었다. 원래는 P를 기다리며 장기하 산문을 읽을 요량이었는데, 일단 지금 당장 더 재밌는 건 가게 안을 속속들이 탐닉해보는 것이다. 사실 여자가 바버샵에 이렇게 들어오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지 않나. 그 희귀한 경험을 살려봐야지.
처음 만났을 때 P의 스타일같은, 포마드헤어를 한 이탈리아 미남들의 사진이 거울 위에 전시되어 있고 바닥에는 어퍼컷 디럭스라고 쓰여 있는 스티커가 드문드문 붙여있다. 무슨 뜻일까, 어퍼컷 디럭스라는 건. 헤어제품 브랜드이려나. 한 켠에 반딱거리는 유광 와인색 가죽 쇼파가 마음에 들어 거기에 앉기로 했다. 그리고 거울 위에 사는 이태리 미남과 똑같은 머리를 한, 그러나 연륜과 함께 실버에디션을 장착한 사장님의 가운 뒤에는 세 개의 해골이 새겨져 있었다. 계속 머리하는 걸 멀뚱히 바라보는게 뭔가 민망해져서, 장기하 책을 폈다. 산문에 여러번 등장한 비틀즈 앨범이 궁금해져서 노래를 찾아 듣고 있는데, 공을 들인 문화생활에 이번엔 조금 더 센 방해가 등장했다.
여자 사장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레드와 그린 시그니처 색감이 만연한 구찌스웨터에 나이키 범고래 덩크로우를 신으신.
커피를 주냐니까? 실버 포마드 사장님과 동년배 여사장님은 나보다 힙한, 아니 여의도 더현대 지하 1층의 20대 MZ보다도 힙한 의상이었다. 탁월한 소화력을 감탄하는 마음으로 보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아 예예, 주세요 따뜻한 거로요.
애써 다시 책을 열었다. 오늘은 기다리며 책을 읽는게 계획이니까. 그래도 뭔가 반전매력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한 귀퉁이의 일도 놓치기 싫어, 귀에서 이어폰은 뺐다. 때마침 비틀즈 Abbey road의 Octopus’s garden이 나올 때였고 가게 스피커에서는 범고래 덩크로우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젊은 직원이 출근했다. 지각인듯한, 헐레벌떡 들어온 직원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로 P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사장님의 옆으로 가 뒷짐을 지고 관찰 중이다. 일찍 왔음에도 반절치만 잘려나간 P의 머리카락, 언젠가 P가 사장님이 시간이 많으면 정성껏 봐주신다고 했던게 기억났다. 반절이지만 원체 숱이 많은 P의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바닥에 뒹군다. 직원은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다. 아까 그 페이지 그대로, 손에 쥔 책은 뒷전이 된 지 오래다. 사각사각 잘려나가는 P의 모습을 한참이나 보고 있자니 드디어 여사장님이 면도를 해주신다고 한다. 바버샵의 클라이막스, 숙련된 마무리를 향해가는 것이다.
여사장님이 수북한 P의 머리카락 무덤에 미끄러질 뻔 했을 때, 그제서야 직원은 빗자루로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무척 즐거웠던 토요일 아침이었다.
바버샵이 이다지도 이상한 즐거움이 많은 곳이었을 줄이야. 마치 처음 놀이공원에 갔던 때의 기분이랄까. 움직이는 차를 타고 파랗고 검은 조명의 어두운 동굴같은 실내로 들어가, 생전 만화에서만 보았던 아라비아 모험이야기가 나오는 어트랙션 따위 같은. 다시 나오면, 햇살은 쨍하게 부서지고 나는 서울 한복판인 그런 요상한 느낌.
P는 다시 순박한 외모에 포마드로 쫙- 깔쌈한 머리를 한 반전매력의 사나이가 되었다. 그게 아주 마음에 들어서, 바버샵 문을 함께 열고 눈알 시린 햇볕을 내리 맞으며 평양냉면에 낮술을 하러 가기로 했다. 오늘 장기하 산문은 미뤄두고 바버샵 곳곳을 읽어보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죄송합니다 장기하씨, 이번 토요일엔 꼭 읽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