벳부 지옥 온천, 급똥 극복기
- 행복한 우리 가족 여행 1-일본 벳부
2017년도 겨울 벳부 여행만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턱 막혀 온다.
그날 아내와 나는 벳부에서 온천을 즐길 생각으로, 벳부 역 근처에 숙소를 잡고 유후인으로 향했다. 유후인은 소문대로였다. 역에서부터 긴린코 호수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유노츠보 거리에는 음식점이 즐비했고,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가게 천지였다. 아내는 '일본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 라며 좋아했지만, 내 눈에는 쇼핑과 군것질을 좋아하는 여성들을 위한 테마파크처럼 보였다,라고 하면 좀 야박한 평가일까.
아내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유후인에서 반드시 먹어야 하는 음식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치열한 예선을 통과해서 본선에 오른 먹거리로는, 킨쇼(금상) 코로케과 스누피 녹차 아이스크림, 미르히의 치즈 케이크와 푸딩 등이 있었다. 내 눈엔 평범한 간식거리에 불과해 보였지만, 유후인에서는 꼭 먹어봐야 하는 귀한 음식들이란다. 아내는 나름 미식가여서 여행만 오면 꼭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을 먹어 보려고 한다.
후쿠오카 사람들이 일본 제일이라고 부르는 킨쇼 코로케는 코스트코에서 파는 냉동 코로케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유후인의 3대 아이스크림 중 하나라는 스누피 녹차 아이스크림도 먹어 봤는데, 그냥 평범한 아이스크림 맛이었다. 미르히의 치즈 케이크와 푸딩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미식가인 아내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가며 맛의 오묘함과 식감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나는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다. 아내는 마비된 내 혀에 당장 벌침을 놓아야겠다며, 눈을 흘겼다.
아내의 간식 대탐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긴린코 호수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아내는 "이 집은 뭐가 뭐가 그렇게 맛있다던데..."라고 중얼거리며, 폭탄 타코야키, 롤케이크, 숯불에 노릇노릇 구운 무슨무슨 꼬치 등을 사 먹었고, 나도 그냥 멀뚱멀뚱 서 있을 수 없어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평소에 먹지 않는 음식을 먹어서일까?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유후인의 긴린코 호수는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을 가까이에서 품어 줄 줄 아는 호수라고나 할까. 호수를 한 바퀴 돌아봤는데, 하루쯤 이곳에 머물면서 온천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를 감싸고 있는 산에는 수령이 족히 백 년은 넘었을 것 같은 나무들이 빽빽했는데, 나무들의 색깔이 층층이 다른 것이 인상 깊었다.
유후인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벳부로 돌아오다 우리는 바다 지옥이라는 곳에서 내렸다. 지나가는 길에 벳부에 오면 누구나 다 한다는 '벳부 지옥 온천 순례'를 해 보기로 한 것이다. 바다 지옥 주차장에 내려서 벳부 다운타운 쪽을 보니 도시 곳곳에서 증기가 솟구쳐 오르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이곳은 원래 이곳저곳에서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와서 사람들이 살지 않는 불모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 일본인들은 이곳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는 뜻에서 '지옥'이라고 불렀단다.
그러다 아부라야 구마히치라는 인물이 '지옥 순례'라는 여행 코스를 개발하면서 벳부에 대한 인식을 180도 바뀌어 놓았다.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곳마다 '바다 온천' '가마솥 온천' 도깨비산 온천' 등 그럴듯한 이름을 갖다 붙이고, 이 지옥을 구경하라며 대대적으로 홍보를 한 모양이다. 세상사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게 또 대성공을 거둬서 지금은 이 '지옥 온천 순례 코스'가 벳부를 상징하는 관광자원이 되어 버렸다. 출판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책은 제목이 80이다.'라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런데 이제 보니 관광업계도 네이밍이 중요한 거 같다.
'지옥 온천 순례' 대신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웅덩이 순례'라고 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우리는 지옥온천 중 가장 그 규모가 크고 인기 있다는 ‘바다지옥’을 보기 위해 티켓을 끊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다 지옥의 온천수는 신기하게도 푸른 바다 색깔을 띠고 있었는데, 증기가 쉴 새 없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와~ 증기 엄청나네.'라고 시시덕거리며 잠깐 구경을 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에게, 이게 다야?"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가장 인기가 많다는 바다 지옥이 이 정도면, 다른 지옥은 보나 마나 겠지?"
아내도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나머지 7개 지옥 구경은 모두 패스하고 벳부 시내로 내려가서 제대로 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것저것 간식거리만 잔뜩 먹었더니 밥이 그리웠다. 마침 바다 지옥 주차장 앞에서 벳부 역까지 가는 버스가 있어서 얼른 버스에 올랐다. 그 버스는 나머지 7개 지옥코스를 다 돈 뒤에 벳부 시내로 내려간단다. 산 중턱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라 길이 몹시 구불구불했다.
버스가 '산지옥'을 지나 '부뚜막 지옥'으로 향할 때였다. 갑자기 급똥이 왔다. 아무래도 오전에 유후인에서 먹은 음식 때문인 것 같았다. 평소에 안 먹던 음식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은 게 문제였다. 달리는 버스에서 급똥이 와 본 적이 있는 분은 그때 내 심정이 어땠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문자 그대로 숨이 턱 막혔다. 급똥이 기차나 비행기에서 왔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화장실까지만 가면 해결이 되니까. 하지만 달리는 버스에서는 답이 없다.
내가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아내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가 나지막이 "급똥"이라고 대답하자, 아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코를 실룩거리며 킥킥거렸다.
솔직한 얘기로, 여행지에서 급똥이 온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다. 여행 중에 두통이나, 생리통에 걸려 고생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도 나름 꽤나 심각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급똥은 두통이나 생리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잠시 참지 못할 두통이 어디 있을까? 생리통이 아무리 짜증스럽다 해도 급똥만큼 짜증스러울까?
버스는 다시 급커브를 돌더니 '도깨비산 지옥'이라는 곳에 정차한다. 순간 '여기서 내려서 볼일을 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현실을 파악한다. 우리가 탄 버스가 지나가는 지옥 순례 코스에는 길가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적당한 골목도 눈에 띠지 않는다. 여기서 괜히 잘못 내렸다간 자칫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
아시는 분은 아니겠지만, 갑자기 급똥이 오면 숨도 마음대로 쉴 수가 없다. 나는 코로 천천히 숨을 쉬면서 빨리 버스가 벳부 역에 정차하기만 바라고 있었다. 버스는 이제 막 '금륭 지옥'인가 무슨 지옥인가 하는 곳을 지나고 있었다. 그나저나 벳부 시내로 내려가는 길이 왜 이렇게 꼬블꼬블한 걸까? 버스가 코너를 돌 때마다 배가 출렁거려서 위태위태했다. 게다가 일본 버스는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는 걸까? 딱 봐도 정거장에 아무도 없는데도 일단 무조건 정차를 한 뒤, 타는 손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출발한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아무래도 지금 내가 바로 그 인간의 한계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 든다. 나도 모르게 가방에서 주섬주섬 휴지를 꺼내 손에 들었다. 그러자 아내가 웃음을 꾹 참으며 입꼬리를 실룩거린다.
"뭐야, 여기서 틀어막으려고?"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에 일일이 반응할 여유가 없다. 나는 아내의 말은 그냥 무시하고, 한 곳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버스가 '흰 연못 지옥'을 지날 때쯤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이 사건은 결국 파국으로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버스는 벳부 역 서쪽 출구 정류장에 멈춰 섰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파국으로 치닫던 급똥이, 버스가 멈추자 신기하게도 움직임을 딱 멈춘 것이다. '간발의 차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경험해 본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일단 급똥이 오면 멈추는 법이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번엔 급똥이 결정적인 순간 딱 멈춘 것이다. 아, 정말이지 여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소소한 기적이었다.
여러분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지 모르겠다. 힐링, 관광, 휴양, 쇼핑, 먹방..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떠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런 것도 '먹고, 자고, 싸고'가 원활하게 기능할 때의 얘기다. 이런저런 이유로 잠을 설쳤다거나, 음식이 입에 안 맞아서 식사를 못 했다거나, 3일 동안 화장실을 못 갔다거나, 하면 여행을 즐기기가 힘들다. 그만큼 여행에서 '먹고, 자고, 싸고.'는 중요하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바로 싸는 일이다. 이 일은 사람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먹는 일이나 자는 일은 내가 스스로 어느 정도는 조절할 수가 있다. 시간과 장소도 바꿀 수 있고, 취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싸는 일은 그렇지가 않다. 내가 시간과 장소를 정할 수도 없고, 연기할 수도 없다.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초긴급사태는 일단 벗어났지만, 상황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어서 나는 최대한 단전에 힘을 쥐고 버스에서 내렸다. 땅을 밟으니 그래도 아주 조금이지만 아랫배가 안정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자기 정말 괜찮아?" 라며 뒤늦게 걱정을 해 주었지만, 입꼬리에는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벳부 역 바로 옆에 호텔을 잡은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나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호텔까지 걸어갈 수 있었고, 급똥과의 기나긴 줄다리기를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마칠 수 있었다.
내게 있어 2017년 겨울 벳부는 여행지가 아니라, 살 떨리는 격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