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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근기 Oct 10. 2020

자이살메르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의 청춘 여행기 13-인도 자이살메르 

인도 여행은 기차로 시작해서 기차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인도에서는 한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만사 다 제쳐 놓고 기차표 예매부터 해야 해요. 2~3일 전에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기차표를 구매할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조드푸르에서는 신발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그만 기차표를 예매해야 한다는 걸 깜빡 해 버렸어요. 그래서 조드푸르를 떠나기 전날 아침에야 부랴부랴 여행사를 찾아갔어요.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SL(일반 슬리퍼 칸), Ac2(에어컨 있는 2등석 칸), Ac3(에어컨이 있는 3등석 칸) 모두 매진이 되었네요.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돌아설 순 없잖아요. 나는 얼른 '알에씨(RAC)'나 '웨이팅' 티켓이 있는지 물어봤어요. RAC는 오버부킹 티켓으로 취소된 티켓의 자리를 우선 배정받을 수 있는 티켓이에요. 좌석이 있는 일반 티켓(General 티켓)이 다 팔리면 RAC로 넘어가는데, RAC라고 적혀 있는 표를 소지한 승객은 일단 기차 탑승이 가능해요. 이 티켓을 소지하고 있으면 열차 출발 직전 좌석을 지정받을 수도 있고, 열차 탑승 후 직원을 통해 좌석 확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어요. '웨이팅'은 한 마디로 ‘대기 번호’ 예요. 누군가가 취소를 해야 좌석을 지정받아 탑승할 수 있는데, 그 순서를 미리 정해 놓은 것이죠. 열차 출발 직전까지 아무도 취소를 하지 않으면 이 티켓은 자동 취소돼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래요. 오늘은 알에씨나 웨이팅도 없다는 거예요. 12월은 인도 여행 시즌이라서 외국인이라고 해도 쉽게 기차 티켓을 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전 결국 ‘딱깔’ 티켓을 사기로 했지요. '딱깔'이란 웃돈을 주고 사는 표를 말해요. 원래는 Tatkal(타트칼)이라고 발음하는데, 그게 한국 사람들 귀에는 ‘딱깔’로 들려요. 딱깔(Tatkal, Emergency Ticket) 티켓은 기차 출발 하루 전, 오전 10시부터 판매를 하는데(오프라인 오전 10시, 온라인 오전 10시 반부터 구입 가능) 일반 티켓보다 가격이 30% 정도 비싸고, 취소와 환불이 불가능하답니다. 한 마디로 외국인 호갱님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티켓이지요.

만약 이 딱깔 티켓도 구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때는 마지막 방법이 한 가지 있어요. 바로 TQ(외국인 여행자 할당 티켓)를 사는 것이죠.  TQ는 외국인들을 위해 할당해 놓은 티켓으로 여행사에서는 구입할 수 없고, 철도청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전용 창구나 인도 철도청(IRCTC) 사이트에서 예매할 수 있어요. 물론 가격은 일반 티켓보다 비싸고, 외국인 전용 창구 앞에서 대기표를 받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건 기본이지요.  


다행히 전 그 여행사에서 딱깔을 살 수 있었어요. 딱깔은 기차 출발 전날 오전 10시부터 판매하는데, 마침 제가 여행사를 찾아간 시간이 10시 무렵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산 딱깔 티켓은 '어퍼'가 아니고, D(다운)이었어요. '다운'은 낮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앉아 가다가 밤에만 누울 수 있는 좌석이에요. 쉽게 얘기해서 낮에는 '공유 좌석'이고,  밤에만 '개인 좌석'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아무튼 여러 가지로 불편한 좌석이지만, 지금 제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요. 일단 덥석 물었죠. 

다음 날 새벽 1시쯤 조드푸르 역에 도착해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역 바닥에 들어 누워 기차를 기다리고 있네요. 

기차 출발 시간은 새벽 2시였지만, 제시간에 올 리가 없겠죠. 일단 적당한 곳을 골라 바닥에 침낭을 깔고 벌러덩 드러누웠어요. 사실 저도 처음에는 바닥에 눕는 게 좀 찝찝했는데, 한 달 정도 인도 여행을 하다 보니 이젠 제법 익숙해졌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 눈을 떠보니 플랫폼에 소가 들어와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 있죠. 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누워 있는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니고 있었어요. 제 눈에는 꽤나 위험해 보였어요. 저러다 사람을 밟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행히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청년이 벌떡 일어나 소를 플랫폼 밖으로 쫓아내네요. 인도에서는 소를 신성시 여겨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내버려 둔다고 알려져 있잖아요? 하지만 인도에 와서 직접 경험해 보니,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간혹 나무 잣대기로 소 엉덩이를 후려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답니다. 이래저래 어수선한 분위기가 싫어서 2층에 있는 워이팅 룸(SL 이상 티켓 소지자만 입장 가능)으로 올라갔어요. 마땅히 누울 자리가 없어서 쓰레기통 옆에 침낭을 깔고 드러누웠지요. 아, 오늘 자이살메르행 기차는 또 몇 시간이나 연착하려나.   

그러다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기차가 들어올 때 흘러나오는 그 음악소리가 들리지 뭐예요. 나는 훈련소에 서 첫날밤을 보낸 신병처럼 벌떡 일어나 침낭을 돌돌 말아 넣고, 얼른 플랫폼으로 내려갔어요. 3시간밖에 연착을 안 하다니! 오늘은 정말 운이 좋네요.


기차는 새벽 5시쯤 조드푸르 역을 출발했어요. 달리는 기차 안에서 보는 새벽 풍경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게 또 있을까 싶어요. 서서히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넓은 들판에 엷은 붉은 빛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어요. 일찍 깨어난 나무들은 가볍게 몸을 흔들며 붉은빛을 툭툭 털어내고 있네요. 기차는 그런 낭만적인 풍경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 걷히지 않은 철길 위의 어둠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집중하고 있어요.       


지금 제가 가고 있는 자이살메르는 타르 사막 위의 황금도시로 불리는 곳으로, 황량하고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도시예요. 타르 사막을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경도시이기도 하죠. 


제가 이렇게 먼 곳을 굳이 찾아가는 건 사막에서 낙타 사파리를 하기 위해서예요. 사실 자이살메르는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에요. 2002년도에 처음 방문했었는데, 여러 가지로 깊은 인상이 남아 있는 도시예요. 1000년 전에 세워진 아름다운 자이살메르 성과, 그 성 안에서 지금도 여전히 삶을 영유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인상 깊었던 도시였어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다시 한번 와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바라나시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함께 가자고 하도 조르는 바람에 다시 찾게 되었어요.  


한번 가 본 길이어서일까요? 창밖으로 보이는 아침 풍경이 낯설지가 않네요. 서부 영화의 배경으로나 나올 법한 삭막한 사막 풍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너무 똑같은 풍경에 절로 하품이 터져 나오려고 하네요. 마른 풀더미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걸 보니 바람이 꽤 부나 봅니다. 


가끔씩 정차하는 기찻길 역 주변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네요.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쓰레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이를 닦고 있는 사람들, 용변을 보고 있는 사람들, 언제 봐도 참 괴상한 광경입니다. 인도에는 화장실이 없는 집이 많아서 가난한 서민들은 이렇게 기찻길 옆에서 용변을 본답니다. 왜 하필 기찻길 옆에서 용변을 보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오늘은 용변을 보면서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도 보이네요.  


자이푸르를 출발한 지 한 6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어요. 갑자기 사람들이 황급히 창문을 닫기 시작하네요. 왜들 이러는 걸까요? 바라나시에서부터 함께 동행한 여행자가 '형! 창밖을 좀 보세요."라고 하기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으아, 세상에! 영화 '미라'에나 나올 법한 모래 폭풍이 기차를 향해 몰려오고 있지 뭐예요. 전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래폭풍이라는 걸 봤는데, 엄청난 스케일에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어요.  


나도 얼른 창문을 닫고, 카메라를 가방 깊숙이 찔러 넣었어요. 모래 때문에 카메라가 고장 났는지 얘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모래 폭풍은 순식간에 기차를 덮쳤어요. 모래 폭풍이 기차를 훑고 지나가는 순간, 기차가 출렁하는 느낌(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이 들었어요. 모래가 기차에 부딪치자 시차에서는 콩 볶는 소리가 났어요. 타닥타닥... 타닥타닥... 창문을 모두 닫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어요. 아귀가 안 맞는 창문이 많아, 창문 틈새로 쉴 새 없이 모래가 비집고 들어 왔거든요. 정말이지 살다 살다 별별 경험을 다해 보네요. 


모래폭풍은 10여분 만에 지나갔지만, 모래 바람은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졌어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입안에서는 계속 모래알이 서걱거렸답니다. 보통 인도 기차 안에서는 머리를 창가 쪽으로 두는 게 상식이에요. 복도 쪽에는 사람도 많이 지나다니고, '어퍼 칸'에서 내려오는 사람의 발에 밟힐 염려도 있거든요. 하지만 창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모래 바람이 웬만해야지요. 그래서 전 결국 복도 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웠어요. 

그런데 이게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인도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술을 금지하고 있어요. 공공장소에서는 술을 마시지 못하지요. 하지만 어느 나라나 하지 말라도 하면 꼭 더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기차 안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몰래 마시는 인간들이 꼭 있답니다. 


모래 바람도 어느 정도 지나갔는지 타닥타닥.. 소리도 한결 잦아 들 무렵이었어요. 갑자기, 정말 아무 전조도 없이, 어퍼 자리에 있던 인도인이 토를 하지 뭐예요. 물론 술을 과하게 마시면 토를 할 수 있지요. 그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토를 할 땐 최소한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게 있잖아요. 변기에 대고 하거나, 적어도 봉투에다 얼굴을 묻고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인간은 그냥 복도에다 토를 하는 거예요. 


그 바람에 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고. 토의 일부가 제 머리로 떨어졌어요. 인도 여행을 하면서 이때처럼 짜증스러운 순간은 없었던 거 같아요. 생각 같아서는 멱살을 잡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었지만, 말이 안 통하니 그럴 수도 없고.... 인사불성인 인간을 붙잡고 화를 내 봐야 제 입만 아프지 않겠어요. 


재빨리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토를 손으로 털어낸 뒤, 화장실 옆에 붙어있는 개수대를 향해 뛰어갔어요. 생각 같아서는 시원하게 머리를 감고 싶었지만, 인도 기차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기차 개수대에 달려 있는 수도꼭지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그런 수도꼭지가 아니에요. 수도꼭지 윗부분을 손으로 꾹 누르고 있어야 물이 졸졸 새어 나오는 특이한 구조지요.  


아무튼 수도꼭지의 이런 독특한 구조 때문에 머리에 달라붙어 있는 토의 흔적을 빨리 지울 수 없었어요. 왼손으로 수도꼭지 윗부분을 누른 채, 오른손으로 졸졸 새어 나오는 물을 받아 머리카락에 들러붙어 있는 토의 흔적을 씻어내야만 했지요.   


갑자기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네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일단 역한 냄새부터 지우고 봐야겠지요. 한 5분 정도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겨우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토의 흔적을 지울 수 있었어요. 하! 자이살메르로 가는 길, 정말이지 만만치 않네요.


잠시 후, 자이살메르가 가까워지지 기차 안이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네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이살메르 역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어디선가 집시들은 나타나 노래를 불러요. 물론 노래가 끝나면 돈을 요구하지요. 집시 무리가 다음 칸으로 이동하자, 이번엔 짜이왈라가 등장하네요. 


짜이 짜이~~ 가람 짜이~~ 하는 소리에 얼른 손을 들어 짜이 한잔을 주문했어요. 정신을 차리는 데 짜이만 한 게 없죠. 예전에는 기차에서 파는 짜이의 잔은 토기였어요. 작은 토기 잔에 든 짜이를 다 마신 후에는 그냥 기차 밖으로 휙휙 내버리곤 했죠. 하지만 요즘은 종이컵에다 짜이를 담아 줘요. 짜이가 다 거기서 거기겠지 싶겠지만 그 맛은 크게 다르답니다. 


아무튼 따뜻한 짜이 한 잔을 홀짝거리며 기차 안을 둘러보니 모두들 각자의 짐을 챙기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네요. 다음은 자이살메르 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 짜증나는 일을 겪었고, 여행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차갑게 식었던 피가 다시 혈관을 타고 도는 느낌이 듭니다.  


다음 목적지가 가까워질 때 느끼는 이 설렘! 이 설렘은 여행을 통해서만 맛볼 수 있기에, 나는 계속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 드디어 기차가 자이살메르 역으로 들어서고 있네요. 사막의 강렬한 햇살에 눈이 부셔 선글라스를 끼고, 배낭을 매고, 기차에서 내립니다. 자이살메르에서 이번엔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요? 바삭하게 튀겨진 듯한 햇살을 받으며 낡은 배낭을 다시 한번 고쳐 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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