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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근기 Nov 19. 2020

자이살메르 성과 이야기 도마뱀

-나의 청춘 여행기 14 -인도 자이살메르

자이살메르 기차역에서 내리자 호객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원빈 사파리' 니 '장동건 사파리'니 하는 피켓을 들고 기차에서 내리는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마치 공항 입구를 연상케 한다. 이들은 무슨 경쟁이라도 하듯 재빠르게 낙타 사파리 투어를 예약한 손님들을 낚아 채 갔다. 사실 자이살메르 기차역에서부터 성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걸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짐도 있고, 긴 여정에 지쳐있기도 해서 우리는 오토릭샤를 타고 성 안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릭샤왈라는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연실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자기가 아는 숙소가 있는데 가격이 베리 베리 칩이라는 둥, 핫 샤워가 24시간 풀가동이라는 둥... 떠들면서 빤을 씹고 있어서 썩은 박하향이 코를 찌른다. 빤은  인도 남성들이 식사 후에 입가심으로 즐기는 일종의 껌이다. 후추나무 잎에다 장미 젤리, 수파리 약초, 코코넛 등을 섞어 즙이 나올 때까지 씹다가 버리는데, 향이 독해서 비위가 약한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릴 수 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로봇처럼 미리 점찍어 둔 숙소 이름만 반복했다. 이럴 때 괜히 맞장구를 쳐 주다가는 여행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자칫하면 이 오토릭샤를 타고 자이살메르 전역을 순회하며 숙소를 찾아다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면 릭샤왈라가 호객행위를 하려고 할 때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사람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노" "고 스트레이트"만 되풀이하는 게 좋다.


우리가 점 찍어 둔 숙소는 '머드 미러'라는 곳이었는데, 성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이나교 사원 뒤쪽 골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숙소였다. 무엇보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기가 막혔다. 벽돌로 지은 갈색의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마을 뒤로 보이는 초원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넓게 펼쳐진 지평선을 배경으로 풍력 발전기 수 십 대가 돌아가고 있었는데, 사막의 한 줄기 실낱같은 바람을 맞으며 느릿느릿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의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 나른하게 만들었다.

대강 짐을 정리한 뒤, 낙타 사파리를 예약하기 위해 숙소 밖으로 나와 여행사를 물색해 봤다. 성 밖으로 나가야 할지, 그냥 성 안에 있는 여행사 중에 적당한 곳을 알아봐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던 낙타 몰이꾼 몇몇이 우리를 보더니 대뜸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카멜 사파리?" "감자 공짜 준다." "여기 진짜 싸다 싸!"  


요즘은 인도 어디를 가나 간단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인도인들은 동북아시아인들을 보면 무조건 "곤니찌와"라고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요즘은 "안녕하세요." 아니면 "니하오"가 대부분이다


자이살메르 낙타 사파리는 가격 담합이 되어 있어서 어디나 다 비슷하다. 우리는 낙타 몰이꾼들이 추천해 준 여행사에서 예약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담당 직원은 반색을 했다. 마침 내일 예약한 한국인 여행자들이 몇 명 더 있으니까, 한 팀을 이루면 좋을 것 같단다. 우리도 그 편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하자고 하고, 서둘러 계약을 했다. 낙타 사파리는 럭셔리 텐트 투어와 일반 투어로 나뉜다고 한다. 럭셔리 텐트 투어를 선택하면 더블 사이즈 침대랑 호텔식 이불을 제공해 주고, 전기도 사용할 수 있단다. 사막에서 핫 샤워도 가능하다나 뭐라나.(에이 설마...) "물론 가격이 조금... " 까지 듣다가, 나는 재빨리 손을 휘저었다.  "아아, 됐고요. 그냥 일반으로 할게요."

예약을 마친 뒤, 자이살메르 성을 한 바퀴 둘러봤다. 약 천년 전 마하라자 왕조가 세운 자이살메르 성은 그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변치 많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삽화에서 본 듯한 골목에는 유난히 양탄자를 파는 가게가 많았는데, 마치 텐트를 치듯 양탄자를 펼쳐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신밧드의 모험>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했다. 아라비안 나이트 이야기를 각색해서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만든 애니메이션이었다. 모험을 떠난 신밧드는 알라딘, 알리바바 등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만나 매 회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신밧드가 길에서 만난 한 노인을 업어주었는데, 노인의 몸이 거인으로 변하는 장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자이살메르 성은 그 신밧드의 모험에 등장하는 성의 모습을 쏙 빼닮아 있었다. 성 입구에 걸려 있는 형형 색깔의 양탄자, 피리를 부는 노인, 그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살모사, 히잡을 쓴 채 항아리를 지고 가는 아낙들, 터번을 두르고 소를 끌고 가는 남자들... 나도 모르게 수 십 년 동안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는 신밧드의 모험 주제가를 흥얼거리며 걸어다녔다.  


"신밧드야 오늘은 어디를 가니

우리 모두 듣고 싶다 요술 보따리

펼쳐라 펼쳐라 너의 모험담

울끈불끈 용기가 용솟음친다.

아무도 모르는 신비의 나라

우리 모두 가고 싶다.

요술의 나라~~ "

성 입구 쪽에는 부유한 상인들이 살았다는 저택이 있었다. 그중 하벨리라는 건축물이 가장 화려해 보였다. 하벨리는 18세기에 다섯 개의 건물을 연결해서 세웠는데 중개업으로 부를 축척한 자이나교 신자 오 형제가 60년 동안 이 건축물은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역시나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입장료를 내야 하는 건축물 안으로는 들어가고 싶지가 않다. 우선 돈이 아깝기도 하고, 안에 들어가 봐도 큰 감흥을 느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건축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 같은 문외한의 눈에는 다 그게 그거처럼 보인다. 오늘도 입장료를 내야 하는 하벨리 주택은 패스다. "뭐 굳이 들어가 볼 필요가 있나. 밖에서 봐도 다 보이는데." (" 저 포도는 분명 실 거야." 라고 말하는 이솝 우화 속 여우의 말투가 이랬겠지?) 


오늘은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느긋하게 성 안 골목을 이리저리 걸어 봤다. 이 성에는 자이살메르 인구의 4분의 1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골목마다 우리 같은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한 가게와 호텔들로 가득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가게라고 해도 새로 지은 게 아니고, 원래 이곳에 있던 건물을 활용했기 때문에 제법 운치가 있다. 마치 내가 발리우드 영화 세트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멋진 골목도 있었다. 창문의 형태도 매우 아름다웠고, 하나하나 돌을 깎아 만든 장식들도 무척 인상 깊었다. 창가에 걸어 놓은 빨래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발리우드 영화에서처럼 사리를 입은 여자들이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나와 떼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내 눈에는 이 골목에 살고 있는 인도인들의 생활 모습이 꽤나 한가하게 보였다. 환기를 하려는 것인지 대부분의 집들이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어 집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바닥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아저씨,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주부들, 좁은 골목에서 크리켓을 즐기고 있는 아이들, 활짝 열린 문 앞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노인들...


마침 집 앞 문턱에 걸터앉아 한가하게 전화를 걸고 있는 소녀가 있기에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고개를 옆으로 까닥까닥한다. 인도에서는 고개를 옆으로 두어 번 까닥 거리를 건 오케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막상 그런 몸짓을 직접 보면 왠지 싫다고 하는 것처럼 느껴져 조심스러워진다. 전화를 걸고 있는 소녀와 배경이 예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더니, 소녀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짧게 스쳐가는 인연이지만 참 상쾌하고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자이살메르에서는 해질 무렵이 되면 성 밖으로 나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자이살메르 성을 봐야 한다. 아그라에서는 타지마할을 봐야 하고, 파리에서는 에펠탑을 봐야 하는 것처럼, 자이살메르에서는 루프탑에서 황금빛으로 물드는 자이살메르 성을 감상해야만 한다.


한 식당의 루프탑에 앉아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드는 성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도마뱀 한 마리가 식탁 밑에서 불숙 튀어나왔다가 어디론가 휑하고 사라져 버린다. 그 순간 문득 이야기라는 짐승이 저 도마뱀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 특히 전업작가는 이번 달 생활비를 벌려면 어떻게 하든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곰곰이 생각한다고 해서 생각나는 게 아니다. 공부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많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럼 대체 작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가? 어찌 보면 작가는 이야기를 기다리는 직업인 것 같다. 작가가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어느 순간 작가에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런 것 같다. 물론 나도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 보려고 부단히 집중하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내쪽의 노력 여부에 달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라는 짐승은 자기가 나타나고 싶을 때 불숙 나타났다가,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특성이 있다. 이때를 놓치면 절대 다시는 그 짐승을 만날 수 없다. 이 녀석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책상 위, 침대 위, 화장실, 길거리, 목욕탕 가릴 것 없이 정말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다. 따라서 늘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녀석이 어디서 나타나든 그 꼬리를 기여코 붙잡고 말겠노라고.


이야기라는 짐승이 나타나면 무조건 재빨리 손을 뻗어 그 꼬리를 붙잡아야 한다. 이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 무턱대고 꽉 붙잡았다가는, 녀석은 꼬리를 끊고 사라져 버린다. (아, 녀석이 버리고 간 꼬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던 새벽이 얼마나 많았던가!) 따라서 녀석의 꼬리를 잡을 때는 계란을 움켜쥐듯 매우 신중해야 한다.  


일단 꼬리잡기에 성공하면 그다음부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다. 그냥 녀석이 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오늘 하루 마지막 햇빛에 반사되는 자이살메르의 성곽을 보니, 왜 이 곳을 '골드 시티'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골드 시티는 금이 나오는 도시가 아니었다. 오늘 하루의 마지막 햇빛을 황금빛으로 바꿔, 사람들의 마음속에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반짝이는 추억을 새겨주는 곳이었다. 자이살메르는 그 놀라운 연금술을 천 년 동안이나 이어오고 있는 사막의 아름다운 도시였다.  


왠지 오늘 밤에는 이야기 도마뱀이 불쑥 내 앞을 스쳐 지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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