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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근기 Dec 08. 2020

황금빛 바다로 가는 길

-나의 청춘 여행기 15- 인도 자이살메르

오늘은 낙타 사파리를 떠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지프를 타고 사막으로 향했다. 자이살메르 시내를 벗어나자 삭막한 초원 지대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른 아침이지만 벌써 햇볕이 따갑다. 왜 이곳 사람들이 이 더위에도 항상 긴팔을 입고 다니는지 알 것 같다.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엉덩이도 함께 춤을 춘다. 나는 유난히 엉덩이에 살이 없는 편이라 그 충격이 남들보다 훨씬 더 했다. 손잡이 꽉 잡고 최대한 지프의 덜컹거림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거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한 1시간 정도 달렸을까. 멀리 8마리의 낙타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연실 입을 푸르르 털며 침을 사방으로 튀기고 있는 저 녀석이 오늘 내가 타고 갈 낙타란다. '이것도 인연인데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둘까.'라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갔는데, 갑자기 녀석이 내 팔뚝을 혀로 쓰윽 핥지 뭔가. 어이~~ 어이~~~ 기겁을 하며 뿌리쳤지만 녀석은 아랑곳 않고 코를 벌름거리며 헤벌쭉 웃었다. 장난기가 많은 낙타다.


비행기와 낙타의 공통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건 바로 이착륙 시 사고가 가장 많이 난다는 것이다. 내가 등에 올라타자 낙타는 아무런 예비동작도 없이 갑자기 엉덩이를 번쩍 들었다. 이크! 내가 운동 신경이 남달랐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앞으로 꼬꾸라져 코가 깨졌을 것이다. 나는 중심을 잡기 위해 얼른 허리를 뒤로 젖힌 뒤, '이 봐! 낙타를 일으켜 세울 때는 미리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제스처를 하며 몰이꾼을 째려봤다. 하지만 낙타 몰이꾼은 고개를 옆으로 까닥거리며 "노 프라브럼"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인도 여행을 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인도인들은 내가 낙타 등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지는 일이 일어나도 "노 프라브럼"이라고 할 사람들이다.    

낙타를 타고 한 20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잠시 낙타 등에서 내려왔다. 가이드는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 다가와 형형색색의 천을 나눠주고, 친절하게 천을 머리를 칭칭 도여 매는 법까지 알려주었다. 이 천을 두르고 있으면 바람과 모래, 그리고 따가운 햇볕까지 모두 피할 수 있다나 뭐라나. 그러더니 '물론 공짜는 아니고요...' 라며 씩 웃는다. 이미 머리에 천을 둘둘 감고 있는 상태여서 다시 벗기도 귀찮았다. 가격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았고. 나만 안 산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고 해서...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빨간색 천 쪼가리를 머리에 칭칭 감고 다시 낙타 등에 올랐다.  


사실 나는 2001년도에도 바로 이곳에서 낙타 사파리를 해 본 적이 있다. 그 시절의 나는 남의 말을 안 듣는 골칫덩어리 청년이었다. 절대 낙타 옆구리를 발로 차지 말라는 몰이꾼의 주의 사항을 무시하고, 낙타 등에 올라타자마자 옆구리를 한 발로 툭 차 봤다. 그러자 낙타의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옳지! 신이 난 나는 카우보이처럼 양발로 힘껏 낙타의 옆구리를 내리쳤다. 그랬더니 낙타가 냅다 달리기 시작하지 뭔가. 낙타가 달리는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아차! 싶어, 얼른 고삐를 잡아당기며 워워~~~ 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낙타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니, 낙타 몰이꾼 한 명이 불이 나게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몰이꾼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자 낙타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나는 고삐를 뒤로 잡아당기며 쉴 새 없이 워~~ 워~~를 외쳤고, 그 사이에 바람처럼 달려온 몰이꾼이 낙타 고삐를 낙아챘다. 그제야 낙타는 입을 푸르르 털며 걸음을 멈췄다.    


그 날의 소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쯤 걸었을까. 갑자기 허리춤이 허전한 느낌이 들어 허리를 더듬어 봤는데 이런! 인도 여행 내내 허리에 차고 다니던 복대가 없지 뭔가. 이 넓은 사막에서 잃어버린 복대를 찾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 뒤, 방금 나를 도와주었던 그 몰이꾼이 씩 웃으며 복대를 내밀었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고맙다는 말도 잊고 독수리가 쥐를 낚아 채 가듯 복대를 낚아챘다. 아마도 내가 낙타를 타고 폭주할 때 허리춤에서 빠졌나 보다. 그런데 왜 그 자리에서 바로 주지 않고, 뜸을 들이다 이제야 건네주었을까? 나의 돌발행동에 대한 작은 벌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 몰이꾼 덕분에 나는 대사관으로 가야 하는 수고를 덜고 낙타 사파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예전에 그런 경험도 있고 해서 이번엔 최대한 점잖게 행동하려고 애를 섰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니 좀 철이 들 때도 됐고. 행여 실수로라도 낙타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찰까 봐, 나는 시종일관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낙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상당히 낭만적으로 보인다. 인터넷에서 그런 사진을 보고 '나도 언젠가 꼭 해 봐야지' 하고 결심하고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물론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걷는 건 꽤나 낭만적이다.

하지만 낙타 사파리에는 몇 가지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우선 몇 시간 동안 계속 낙타를 타고 있으면 지루하다. 처음 몇 분 정도는 누구나 와~~ 하고 탄성을 지르지만, 1시간만 지나면 절로 말이 없어진다. 어디를 가든 풍경이 다 똑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엉덩이 쪽이 심하게 저려오는 것도 큰 문제다. 낙타 등에는 오늘 밤에 내가 덮고 잘 이불과 캠핑에 필요한 물건들이 실려 있고, 그 위에 내가 앉아 있다. 이 이불과 짐은 쿠션 역할을 해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부피가 너무 커서 그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리를 쫙 벌릴 수밖에 없다. 그 자세를 몇 시간 동안 유지하고 있다 보면 '돈 주고 이제 무슨 개고생이냐.'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나를 태우고 가는 낙타는 배가 고픈지 초원에 드문드문 자라나 있는 마른 풀만 보면 멈춰 서서 맛있게 뜯어먹었다. 가끔 바람이 불어오면 동그랗게 말린 마른풀 덩어리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 외에는 볼거리가 전무했다. 오직 황량한 풍경이 지루하게 계속될 뿐이다. 하긴 이런 풍경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늘어놓을 입장도 아니다.  

'이러다 치질 걸리는 게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올 때쯤 캠프를 칠 모래 언덕이 보였고, 우리는 비로소 낙타 등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나는 낙타에서 내리자마자 조심스럽게 다리를 오므려 봤다. 그런 다음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한 뒤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수 십 번 반복했다. 그렇게 한 5분 정도 움직이자 다리 근육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이드들은 낙타 등에 올려 두었던 짐을 내려놓고 캠핑 준비를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 일행은 모래 언덕 위로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너도 나도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모래를 손으로 뿌려 보는 사람, 개구리처럼 팔짝팔짝 뛰는 사람, 대자로 누워 있는 사람, 나처럼 괜히 먼 곳을 보고 있는 척하고 있는 사람 등. 사막에서는 사진 찍는 폼도 참 다양하다.

모래 언덕 맨 위로 올라간 나는 넓게 펼쳐진 초원 지대를 바라보며 여행자 특유의 감상에 젖어 있었다.  

'아!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지평선만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펼쳐져 있는 이 광활한 사막의 한가운데까지 왔구나.'


바로 그때 빨간 터번을 두른 남자가 반대편 모래 언덕을 너머 오는 모습이 보였다. 빨간 터번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이런 오지에 웬 사람이지?' 빨간 터번의 손에는 자루처럼 생긴 가방이 들려있었다. 그가 말했다. "자자, 시원한 콜라 있어요."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사막 한가운데서 콜라 파는 장사꾼이 있다니! 이게 말이 되나?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모래 언덕은 광활한 사막의 풍경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낙타를 타고 진짜 사막으로 가려면 여기서도 며칠은 더 가야 한단다. 한 마디로 우리가 캠프를 친 이 모래 언덕은 관광객 전용 모래 언덕이었던 것이다. 이 모래 언덕 주변에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유목민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나 뭐라나...


불현듯 빌 브라이슨이라는 작가의 여행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루는 여행을 가는 곳마다 관광객들이 우굴거려서 가이드에게 "일반 관광객들이 찾지 않는 오지로 날 데려가 주시오. 고독한 여행을 즐기고 싶소"라고 했단다. 그런데 가이드가 그를 데려간 곳에도 관광객들이 우굴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빌 브라이슨이 따지듯 물었다. "아니, 관광객이 없는 오지로 데려가 달랐더니, 이게 뭡니까?" 그러자 가이드가 대답했다 "여기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저분들도 일반 관광객들이 없는 오지에서 고독하게 여행을 하고자 하는 그런 분들입니다."      


그렇다. 이미 '관광객이 없는 고독한 오지'는 이 지구 상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지금으로부터 약 180년 전에 토마스 쿡 여행사가 다양한 여행 상품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여행은 우리의 일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의 명소는 관광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빠르게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그 후 점점 더 교통이 발달하고, 관광 서비스업이 호황을 이루면서 이젠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때 묻지 않은 광활한 대자연'은 이제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곳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가이드들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모래 언덕에 뜨문뜨문 자리를 잡고 앉아 지평선을 향해 서서히 지고 있는 석양을 지켜봤다. 사막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말똥구리들은 먹잇감인 낙타 똥을 찾아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모래 언덕은 마치 황금빛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보인다.


사막을 배경으로 해가 지는 풍경은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 온 그 무엇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바쁘게 앞만 보고 사느라 내가 버리고 온 것들, 내가 돌아보지 않아 시들어 버린 것들, 내가 걸어온 길 뒤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을 것들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 한편이 아려온다.


한편으로는 오늘 밤이 걱정된다. 사막에서는 해가 떨어지자마자 기온이 급격하게 내려간다. 하루 종일 세수도 못 하고 이도 못 닦았더니 온 몸이 다 꿉꿉하다. '아, 핫 샤워를 하고 따뜻한 침대에서 푹 자고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문득 "누구든 자신이 있는 곳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라는 어린 왕자의 대사가 생각났다. 이런 기가 막힌 풍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호텔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만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고,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한다면, 매 순간 그렇게 산다면, 우리는 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나는 왜 그렇지 하지 못 하고 매 순간 내가 있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까? 바보처럼 이렇게 먼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 와서도 매 순간 다른 곳, 다른 순간을 꿈꾸고 있나? 한심하기 그지없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넘어가자 하늘과 땅의 경계선이 순식간에 흐려지더니, 사막의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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