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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근기 Dec 22. 2020

사막에서 타임슬립 하기

-나의 청춘 여행기 16-인도 자이살메르

해가 지자 모래 언덕에 앉아 한껏 노을에 취해 있던 여행자들은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고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 저녁은 라자스탄식 커리와 짜파티, 그리고 불면 금방이라도 휙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밥이다. 가이드는 이 세 가지를 은색 쟁반에 담아 우리에게 내밀었다. 검게 그을린 짜파티에다 커리를 찍어 한 입에 배어 물었더니 모래가 서걱서걱 씹힌다. 커리에서는 마살라(향신료) 맛이 너무 강하게 다. 눈치를 보니 다른 여행자들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다. 나는 입맛이 없는 척하며 슬며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대충 식사를 마친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닥불 근처로 모여들었다. 가이드는 차례대로 우리에게 킹피셔를 나눠준 뒤, 쇠꼬챙이로 꿴 닭을 랩으로 싸서 바비큐를 만들기 시작한다. 물론 이 모든 건 다 투어 요금에 포함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맥주 하면 킹피셔로 통한다. 맥주 라벨에 물총새가 그려져 있는데, 종류에 따라 색깔이 다른 라벨이 붙어 있거나 병 색깔이 다르다. 그날 가이드들이 사막까지 공수해 온 건 가장 흔한 녹색 병 킹피셔였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취기가 좀 돌 때쯤, 가이드가 물통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빈 물통을 두드리는 소리가 꽤나 흥겹게 들린다. 원래 돈을 더 지불하면 이 시간쯤에 집시들이 등장해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불러 준단다. 하지만 일반 코스로 예약을 한 우리는 그런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자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그런 여행자들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가이드들은 빈 물통을 두들기며 여행자들의 흥을 돋웠다.


흥이 오른 여행자들은 번갈아 가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2001년도에 인도에서 배운 노래를 불렀다. 일명 라자스탄 송이라고 하는 노래인데,  2001년도에는 인도 어디를 가나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10여 년이 지나 인도 사막에서 내가 이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될 줄 미처 몰랐다.

 "빠라데시  빠라데시 지나네행  무진 소리 게 무진 소리 게~~~"   


노래가 끝나자 가이드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힌디어로 말을 걸어왔다. 내가 힌디를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전혀 모른다고 말하면 실망할 것 같아서, 조금 안 다고 대답하자, 다들 박수를 치며 무척 좋아했다. 이때부터 가이드들이 계속 힌디로 말을 붙여 와서 진땀을 뺐다.       

우리가 선택한 코스는 싸구려 일반 코스여서 간이침대도 제공되지 않았다. 그냥 맨 모래 위에 이불을 깔고 누워서 자는 순도 100% 야생 코스였다. 낮에 낙타를 타고 오면서 이불의 상태가 어떤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터라 이불을 덮고 자는 게 선 듯 내키지 않았다. 이불에는 누군가가 오줌을 갈겨 놓은 듯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고, 세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막의 밤은 엄청 춥다. 춥다는 얘기를 하도 들어서 꽤나 옷을 두껍게 입고 왔지만, 뼈를 파고드는 추위를 막을 방법은 저 더러운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사막에도 보름달이 뜨면 주위가 훤히 보일 정도로 밝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캠핑을 한 날은 그믐이라 달을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그날 사막의 어둠은 에스프레소처럼 찐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볼 수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 파묻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불현듯 <나인: 아홉 번의 시간 여행>이라는 드라마가 떠오른다. 주인공이 20년 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신비의 향 아홉 개를 얻게 되면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20년 전 과거로 돌아가 형의 헤어진 첫사랑을 찾도록 도와주고, 아버지를 사고로부터 구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과거를 바꾸면서 그의 현실도 크게 바뀌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신비의 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평소에는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살고 있었는데, 사막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살며시 내 마음속 그 신비의 향을 하나 꺼내 태운다.

이제 막 10살이 된 아이가 구멍가게에서 훔친 초콜릿을 손에 쥐고 골목을 뛰어가고 있다. 아이는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훔친 초콜릿을 조금씩 뜯어먹고 있다.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도 그 아이를 찾지 않는다. 골목에서 놀던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없다.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 말없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이는 반쯤 먹다 남은 초콜릿을 주머니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다. 나는 아이를 와락 끌어안고 따듯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얘야!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고 해서 너무 외로워하지 마. 넌 혼자서도 아주 잘 클 거야. 지금의 그 외로움은 나중에 아주 큰 힘이 된단다. 그러니 울지 말고 용기를 가지렴." 아이는 내 말이 믿기 힘들다는 듯 내 눈을 멀뚱멀뚱 바라본다. 나는 아이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 흔적을 닦아준다.


다시 사막으로 돌아온 나는, 내 마음속 그 신비의 향을 하나 더 태운다.


한 청년이 술에 취해 휘청휘청 강원대학교 후문을 걸어가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인다. 청년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겨울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돌멩이는 텅텅텅 소리를 내며 굴러가다가 겨울 강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멈춘다. 청년은 입김을 내뿜으며 꼼짝 않고 그 돌멩이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청년 옆으로 다가가 함께 겨울 강 위에 놓여 있는 돌멩이를 바라본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말한다. " 곧 봄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저 돌멩이는 분명 깜쪽같이 사라져 버릴 거야." 청년은 흘끗 나를 쳐다본다. 나는 말을 잇는다. "봄이 되면 매일 저녁 강 위로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고, 바람이 은빛 물결을 팔랑거리며 너를 향해 불어올 거야. 그 바람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 봐. 그 바람이 너를 치유해 줄 거야. " 청년은 별 싱거운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씩 웃고 만다. 나는 말한다. "너무 오랫동안 돌멩이를 바라보고 있지는 마. 저 돌멩이는 이번 겨울에만 저 겨울 강 위에 박혀 있는 거야. 곧 봄이 되면.... 넌 아마 네가 저 돌멩이를 던졌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릴 걸."


사막으로 돌아온 나는 눈을 뜨고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방금 전 그 타임슬립으로 인해 내가 조금 변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초콜릿을 훔쳐 먹던 아이가 눈물을 멈추고, 겨울 강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던 청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자, 지금의 나도 달라진 것이다. 냉기가 흐르던 마음 어느 한 구석이 조금은 따뜻해진 느낌이랄까.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부지런히 추위를 밀쳐내던 모닥불 소리도 끊긴 지 오래.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정막이 사막을 덮고 있다.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새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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