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결과부터 적자면 신인상 시 부문 본심에는 올랐으나 최종심은 가지 못했습니다. 1월에 응모한 문예지 신인상이었죠. 반가운 몇몇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3월 21일부터 폭풍 같은 일주일이 지나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는 기분이 드네요.
계속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주로 창작보다는 2030 시인의 시집 읽기 겸 주요 문학상 후보작 읽기를 진행 중입니다. 2021 <문지문학상> 시 부문이라던가, 2022 <현대문학상> 수상 시집이라던가 그런 책을 읽었습니다. 동료들의 평은 백은선 시인이 백은선했다… 이제니 시인이 이제니 했다… 뭐 그런 평이었죠. 독자 입장에서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장욱 선생님, 임지은, 김리윤, 류진, 임유영 시인의 시가 기억에 남네요.
예전에 어느 선배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배도 다른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라는데 옮겨 적자면 이렇습니다.
“비가 내린다고 쓰는 사람에 비해, 비가 온다고 쓰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문학 전공자가 아닌 입장에서는 아주 아리송한 차이일 뿐입니다. 저도 시를 쓸 때나 이런 어감의 차이를 생각하는데, 평상시에는 그렇게까지 쓰지는 않는 편입니다. 무튼 까닭을 설명해보자면, ‘내린다’는 감각은 관찰자의 거리가 확보된 입장이나, ‘온다’는 감각은 그 관찰자의 자아가 지나치게 커서 거리감을 상실하는 탓이라고 합니다. 덧붙이자면, ‘비가 (땅 혹은 바닥 등에) 내린다’와 ‘비가 (내게) 온다’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이 ‘온다’고 쓰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감각하는 것에서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니, 그가 쓰는 시도 신뢰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시를 쓸 때 자아의 크기를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건 시인이 알아서 전략적으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해서 저 이야기를 들었던 당시에는 아- 하는 뭔가가 있었는데, 요즘은 ‘세계-내 자신 사이의 거리’를 문장으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이건 취향의 차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쓰고 퇴근 시간이 임박해버렸기 때문에 채널 조정을 하겠습니다. 드르륵…
2.
흑백 TV를 기억하시나요? 저는 브라운관 컬러 티브이를 유년 시절에 경험한 거의 마지막 세대 아닐까 싶은데, ‘채널을 돌리다’라는 표현도 이제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는 관습적인 표현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옛 TV는 방송사(채널)를 바꾸기 위해 다이얼을 돌렸죠. 스마트폰에 익숙하신 분들은 ‘다이얼’이 뭔지 잘 모를 텐데, ‘회전식 문자판’을 다이얼이라고 합니다. 360도에서 일정 각도마다 정해진 값이 있는 거죠. ‘채널을 돌리다’는 건 저기 다이얼식 TV에서 다이얼을 돌려 방송사를 바꾼다는 의미가 됩니다. 해서 연예인들이 자주 말했던 ‘채널 고정’이라는 개념도 저런 뜻이죠.
할아버지가 “KBS 틀어라”하면 저는 티브이로 달려가 채널을 바꿨습니다. 채널을 바꿀 때는 다이얼에서 드륵, 드륵, 소리가 납니다. 해서 한꺼번에 채널을 바꾸면 드르르륵, 하는 소리가 났었죠.
저는 인간 리모트-컨트롤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이얼식 TV는 리모컨 기능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리모컨이 있는 TV를 샀습니다. 저는 시를 쓸 때 종종 티-브이 라고 즐겨 씁니다만, 그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죠.
리모컨을 손에 넣고서야 저는 리모컨-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집에는 드디어 ‘소파’가 생겼고, 소파에 앉아 손가락만 까딱까딱 채널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채널을 변경하기 위해 TV를 직접 만지지 않아도 된다는 경험은, 어쩌면 ‘콘텐츠’와 ‘사람’의 거리감을 생성해주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이것에 근거를 붙이려면 연구자적 인간기능이 작동해야 하니 증명은 평행우주의 내가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이얼식 TV는 내가 콘텐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내 손끝에 TV 자체가 닿는, ‘유선’의 경험을 주었지만 리모컨식 TV는 ‘무선’의 거리감을 줬다고 할 수 있겠죠. 이건 ‘비가 내린다’와 ‘비가 온다’의 경험적 차이와 비슷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비가 온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쩌면 비를 맞고 있는 상황일 수 있거든요. ‘내린다’고 하는 사람은 분리된 공간 안에서 비를 (안전하게)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아니 그래도 ‘물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리모컨의 버튼을 눌러 채널이 바뀐다는 감각이나, 다이얼을 돌려 채널을 바꾼다는 감각이나 ‘채널을 바꾼다’는 행위 자체로서 동일하지 않냐 하시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내 손 안의 영화관-TV인 동시에 내 손 안의 방송 장비를 함께 가진 세대잖습니까? 뭐, 인정합니다. 10초 내외의 숏츠에 열광하고, 카메라 앞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1020의 감각에 비해 저는 너무 낡았지만요.
3.
저는 카메라가 무섭습니다. 카메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카메라가 너무 명확하게 대상을 포착하기 때문에, ‘내 자신의 영혼’을 카메라(혹은 사진)에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고 하죠. 물론 100년 전의 사진을 보면 해상도가 썩 좋지 않았지만, 양반이나 귀족이 아니면 초상화도 보기 쉽지 않았던 시절에 ‘사진’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저는 매일 아침의 거울이 충격적이긴 합니다만…
거울을 보는 내가 충격적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재미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한 게 3년 전이었는데, 산티아고 여행기는 결국 다 쓰지도 못했고, 근데 그게 중요해? 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3년이 흐른 지금 내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안도하게 됩니다. 무튼 저는 무튼이라는 표현을 무척 좋아하는데 어쨌거나, 이런 표현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시인에 가까워졌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원래 시 쓰는 사람들이 삼천포로 잘 가거든요.
뭐랄까, 시를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제 이야기가 그럭저럭 재미있는 모양입니다. 특히 예전에 글을 썼거나, 지금도 쓰고 있거나 작가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잘 읽는 것 같습니다. 보통 작가들은 산문을 많이 쓰지 않거든요. 산문을 쓰더라도 특이점을 만드는 능력이 약한 사람도 많은데, 저는 그런 점에서 아날로그-디지털, 물성, 레트로한 감각 그런 걸 잘 잡아내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서, ‘창작’이라는 층위로, 그 창작의 결과물이 ‘새로운 것으로써의 어떤 결과’를 보여주려는, 증명하고자 글을 쓰는 사람들(을 줄여서 예술가-작가 라고 합시다)은 자기가 어떤 프로세스를 통해 대상을 감각하고 사유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건 일종의 노하우가 담겨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걸 잘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설명을 못할 수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 엄청나게 설명을 하는데 타인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려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는 ‘나’라는 인간을 ‘렌즈’에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돋보기를 들고 태양빛을 모아 불을 붙였던 경험이 있겠죠. 그게 다 빛-에너지가 응축되면 불을 일으킬 만큼 강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보는데요, 저는 이런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무튼, ‘나’를 렌즈라 생각해봅시다. 과학적 사실은 뒤로 하고요, 상상해보자는 거죠. ‘내’가 렌즈라면 어떤 것을 포착할 수 있을까? 제가 지금 타자를 두드리는 공간을 예로들어 보겠습니다.
단칸방-글을 쓰는 사람-밤-촛불-술-축축함-물이 담긴 컵-을 둘러싼 공간성-공간에 있는 물건-책 이런 식으로 감각하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건 감각하는 순서가 아니라 감각한 것을 속성과 제 나름의 감각 프로세스에 맡게 묶어둔 건데요, 순서대로 가보자면단칸방(공간성) - 글을 쓰는 사람(공간에 있는 내 자신) - 밤(정서적/물리적/시간적 환경) - 촛불(밤에 대항할 수 있는 작은 물건이자 내 크기적으로 비교해볼 때 방-나의 크기 차이와 나-초의 크기 차이가 어느 정도 비슷한 비례를 가지고 있을 테니, 나-초 가 비슷하다고 느끼는 상태-이자 동시에 밤, 현실에 응전하고 싶은, 불타고 싶은 나) - 술(도피처이자 내 스스로를 망치는 수단으로서, 촛불이 스스로를 태우는 것처럼, 연료로써의) - 축축함(젖어버려서 탈 수 없는 역설, 술을 마신 나=젖어서 촛불처럼 탈 수 없는 나) - 물이 담긴 컵(축축한 내가 담길 수밖에 없는 공간, 단칸방과 연결되는 폐쇄성) - 책(글을 써서 작가가 되고 싶은 나와 실제 책 사이의 괴리감, 서가 가득 꽂힌 책에서 느껴지는 벽의 이미지)
라고 정리할 수 있겠죠. 헥헥… 위에서 열거한 것을 각각의 빛줄기라고 비유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나’라는 렌즈가 저것을 감각했겠죠. 문제는 이걸 거의 ‘동시’에 감각한다는 겁니다. 의자에 앉은 존재로서 내 자신이 과장하자면 한 0.1초 사이에 이걸 휙 둘러보면서 감각할 텐데, 문제는 ‘감각’만 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런 물성, 물건, 공간성, 시간성 따위를 아주 짧은 순간 마치 빛이 스쳐가는 느낌처럼 경험하고, 이게 내 자신이라는 렌즈에 왜 포착되었는지 설명하기는 무척이나 어렵다는 거죠. 렌즈로써의 ‘나’는 어떻게 포착했는가,
위에서 설명했지만, 내가 감각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나의 렌즈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렌즈가 있다고 해서 항상 좋은 사진이나 좋은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감각한 것을 어떤 예술의 형식(사진/영화/소설/시 같은)으로 풀어낼 것인가는 테크닉 적인 문제가 될 거고요, 얼마나 당대에 유효한 문법으로 보여주는가에 따라서, 얼마나 그 컨텍스트(대상 간의 연계성)가 확보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잘 만든 예술’, ‘좋은 예술’, ‘나쁜 예술’, ‘실패한 예술’ 따위로 구분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예술가는 내 자신이라는 렌즈를 통해 다양한 것을 감각한 다음, 그것을 설명하거나 보여주는 사람인 셈입니다. 해서 등단을 했니 데뷔를 했니는 중요하지 않죠. 타이틀을 얻고도 저걸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반대로 수상경력이 없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독특한 렌즈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거든요.
4.
제 브런치에서 조회수가 가장 높은 게시물은 「발행하기 전에 생각했나요?」입니다. 예술을 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예술이 뭐 대단한 것도 아니겠습니다만, 저는 스스로 예술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디 예술이 밥 먹여줍니까? 물론 NFT는 밥을 먹여주는 거 같긴 한데 어쨌든,
예술을 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은, 만들기를 시도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특히 한국인일수록 ‘내가 이렇게 생각해도 괜찮아?’라던가, ‘내가 이렇게 써도 되는가?’하는 킹왕짱파워강력한 검열 기계가 내부에서 작동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제 자신 속에도 제 몸뚱이만큼 거대한 가위를 든 수문장이 있어서 시를 쓸 때마다, 이봐요 김씨 여기 컷, 저기 컷, 입구컷, 응 아니야 돌아가 하실 때가 많습니다마는,
오늘은 부쩍 반점을 많이 쓰는 거 같은데 기분탓이라고 해두죠.
킹왕짱파워강력 검열 기계 앞에서 ‘~ 해도 되나?’는 결국 ‘아, 고민해봤는데 아닌 것 같다’로 가게 됩니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글로리아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저가항공사인 라이언에어의 승무원이기도 했죠. 글로리아의 취미생활은 회화입니다. 그는 비행기 승무원인 동시에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취미생활이었죠. 꼬박 3년이 흘렀습니다. 그녀는 요즘 NFT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실상 프로가 된 셈이죠.
글로리아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스케치용 관절인형을 놓고 사진을 찍을 때가 있었습니다. 가끔은 노트를 들고 이것저것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순례길이 끝난 후에는 인스타그램에 유화나 스케치를 올리곤 했습니다. 요즘은 사진도 찍는 모양인데, 미술전공자가 아닌 제 입장에서도 글로리아는 슬슬 무언가를 찾아가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분명히, 취미생활이었는데 말입니다. 한국에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죠.
예술성? 문학성? 창작의 의의? 동시대성? 이제 저는 그런 거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우선은 내가 내 작업을 하면서 즐거울 때가 많은지, 힘들 때가 많은지 그게 중요하다 싶어요. 우리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하면서 100% 행복할 수는 없겠죠. 렌즈로서의 나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오감을 동원해 순간을 체험할 테고요, 그건 총천연색으로 복잡하게 얽힌 어떤 선이자 동시에 덩어리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찰흙을 손에 쥔 아이처럼, 쏟아지는 레고를 바라보는 아이처럼, 무언가 만들다보면 집중하게 되고, 내 스스로를 잊고, 다시 찾고 하면서 글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사실 올해 상반기까지만 하고 글쓰기를 포기할까 싶었는데, 이제는 정말 정리할 때가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분명 심사에 올랐다는 건 축하할 일이지만, 기쁜 동시에 우울하고 힘들었습니다.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포기하려는 나를 꼬드기고 있거든요. 렌즈로서 사는 거 괴롭거든요. 예술이 밥 먹여주지 않거든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글로리아처럼 그냥 취미생활 해보는 거죠. 고-급 취미생활 하다보면 뭐라도 되겠죠. 아, 동료통신 카더라 채널에 의하면 다른 잡지에서도 심사 후보로 올랐던 모양이에요. 결과는 탈락이었지만 더 자세한 내용은 4월에 전하기로 하고요, 저는 우울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다 잠들었었고, 잠들었다 새벽 1시쯤 눈을 떴고, 눈을 뜨자마자 글을 쓰는 동료들의 단체카톡방에서 글 이야기를 읽었고, 시나 써야겠다 싶어서 모니터 앞에 앉았다가, 결국 브런치에 쓸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가 아니고, 빙빙 돌아가는 다이얼처럼 채널이 휙휙 돌아가고 있습니다만, 뭐 그게 중요하겠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저는 또 렌즈에 대한 시를 하나 쓸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거면 충분하다 싶어요.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사실. 그거면 충분할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