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다현 Jul 08. 2019

3. 이별의 끝은 대서양에서

생장에서 출발한 길은 799km를 걷고 나면 끝납니다. 사실 끝나지 않습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별합니다. 성대한 파티가 열립니다. 30일 40일 각자 일정을 가졌던 사람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서로의 일정을 맞추게 됩니다. 처음 15km를 걷기 힘들어했던 리즈는 60km를 걷기도 합니다. 리즈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났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리즈는 스페인어를 잘합니다. 리즈는 60km를 걷다가 프랑스길에서 두 번째로 높은 폰세바돈 정상 부근에 해가 진 밤 10시 무렵 도착했습니다. 숙소는 모두 닫혀 있었고 리즈는 울면서 숙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살려달라고 울고 또 울었답니다. 주인아저씨는 문을 열어주었고 리즈는 저체온증에 시달리지 않고 그 날을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리즈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헤어졌습니다. 크리스와도 헤어졌습니다. 까를로, 데이빗, 카리나, 윤태와 함께 피니스테레로 가기로 합니다. 피니스테레로 가는 길에는 묵시아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옵니다. 피니스테레는 '세상의 끝'이라고 합니다. 로마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오만한 이름입니다. 슬픈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살고 알고 죽었던 로마인들을 생각합니다.


피니스테레에서 순례길 마지막 하루를 보내고 조개껍데기를 바다로 돌려보냅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내가 순례자라는 걸 알려주고 나를 지켜주었으니 이제 친구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이 친구의 집은 대서양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버스가 도착하기 전 바다로 헐레벌떡 달려가 조개를 던지기 전 마지막 셀-피를 찍습니다.


겨우 세 번째 연재인데 벌써 마지막 이야기를 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괜찮습니다. 처음과 끝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서양은 큰 서양일까요. 죄송합니다. 서쪽(西)의 큰(大) 바다(洋)랍니다. 이쯤에서 동쪽은 어디이고 서쪽은 어디인지 궁금해집니다. 지구는 둥급니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에서 진다고 하지만 서쪽으로 계속 가면 영원히 해는 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들은 이제 없습니다. 스페인도 포르투갈도 영국도 대부분의 식민지에서 떠났습니다. 하지만 필리핀계 미국인 까를로와 중국계 캐나다인 크리스와 토종 한국인 나는 영어로 대화합니다. 스페인 사람 데이빗도 파라과이 사람 카리나도 영어로 대화합니다. 윤태도 콩글리시를 써서 대화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쓰는 것은 영어입니까?


사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도 있습니다. 러시아 어딘가에서는 백야가 온다고 합니다. 섬머타임이 적용된 스페인의 4월은 저녁 10시까지 밝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한 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시간만 잃어버렸을까요? 한국에서 파리 샤를 드 골에 도착할 때는 하루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루를 몇 시간 더 살았습니다. 조금 덜 어른이 된 기분이 들어서 뿌듯했습니다.


묵시아로 가는 길 쌍무지개가 떴습니다. 이날 두 번이나 쌍무지개를 봅니다. 소나기가 엄청나게 내립니다. 까를로와 데이빗과 카리나는 갈림길에서 헤어졌습니다. 친구들은 묵시아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와 윤태는 묵시아를 향해 걷습니다. 묵시아의 의미는 모릅니다. 그냥 길이 있으니까 걷습니다. 춥습니다. 무지개를 봐서 다행이지만 무지개를 못 보고 살았다는 생각에 시무룩해집니다.


묵시아에서 조개를 먹습니다. 피니스테레에서 조개를 놓아줄 예정이었는데 조개를 먹는다는 건 미안한 일입니다. 올리브유를 뿌리고 데친 걸로 끝낸 모시조개가 미안하게 맛있습니다. 묵시아에서 밥을 먹는데 선명한 무지개가 뜹니다. 이제 겨우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 윤태와 나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사람들처럼 웃고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습니다. 언젠가 또 무지개의 여러 색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거짓말입니다.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색이 있습니다. 무지개를 엄청나게 확대한다고 상상합니다. 빨강과 주황 사이는 30m쯤 됩니다. 그 30m 사이에 있는 색들이 뭔지 나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그냥 거기 빛이 있을 뿐입니다. 데이빗과 카리나는 쌍무지개를 보면 그게 사라지기 전에 잽싸게 소원을 빌어야 한다고 합니다. 소원은 없습니다. 잠시 로또를 생각해 보았지만 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중요했다면 시를 공부하지 않았을 겁니다. 시는 중요할까요. 시는 적어도 내게는 매우 중요합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므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순례길에서는 가끔 영어로 꿈을 꿉니다. 꿈속의 나는 매우 유창합니다. 아침의 나는 유창하지 않습니다. 익스-큐즈미 나우 아임 트랜스레이팅 인 마이 브레인, 쏘리. 하루에 수십 번은 했던 말입니다. 맥주와 와인을 많이 마시면 머리가 굴러가지 않습니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면 안 될까? 한국어로 묻습니다. 친구들은 그냥 웃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쯤 되면 말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묵시아와 피니스테레는 얼마나 아름답냐고요? 그것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우리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냐고요? 그것 또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거기서 세상의 끝이냐 아니냐가 이제 중요해지지 않은 것처럼요.


중요한 것은 마음일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에게 사진을 보내고 제가 만든 거라고 구라를 칩니다. 어머니는 철석같이 믿고 감동합니다. 사실 이 카멜리아 하트는 데이빗과 카리나 커플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묵시아와 피니스테레로 가는 길입니다. 며칠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거짓을 말합니다. 내가 어머니에게 전한 거짓말은 나쁩니까? 세 시간 정도가 지나서 나는 친구들이 만든 거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미안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잠시 행복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데이빗과 카리나의 마음과 시간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의 어머니에게 전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사람의 모국어가 스페인어고 나의 모국어가 한국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떨어질 때가 되어 자연스레 땅에 떨어진 꽃을 모아두었던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리적으로는 꽃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리고 그 꽃들은 이제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셈이지만, 사람들은 죽음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만, 이별이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경험입니다.


위 사진에서 까를로는 누구일까요. 데이빗과 카리나를 찾아보세요. 루디, 라모나, 이보, 브리짓, 글로리아가 있네요. 이 사람들은 모두 같은 시간 같은 날짜에 산티아고에 도착했을까요? 여기에는 스페인 사람이 있을까요? 생장에서부터 대성당까지 함께 걸었을까요? 이 중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은 없었을까요? 우리는 왜 기념사진을 찍을까요?


사람과 사물을 '본다'는 것은 올바릅니까?


말장난을 해봅니다. 「이별의 끝은 대서양에서」라고 적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별은 헤어짐일까요? 이 별, 디스 스타- 라고 할 수는 없는 걸까요? 정말 지구는 대서양에서 끝나는 걸까요? 지구는 둥그니까 대서양의 출발은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 우리는 세계의 위치를 동과 서로 생각할까요? 남북으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북반구에 있네요. 우리에게는 해가 지지 않는 밤이 없고요. 우리는 그러면 온전한 낮을 가져봤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 사진은 몇 시일까요?


순례자의 머리에서 이파리가 자랍니다. 순례자는 조용하고, 조개가 대신 말합니다. 산티아고는 도시를 말하는 걸까요, 성당을 의미할까요. 우리에게 산티아고는 정말 있었던 걸까요? 나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나는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이라서 내가 저곳에 있었다는 증거들은 매우 부족하거든요.


헤어짐에 대해 말하는 일은 잠시 미뤄두기로 합니다. 아직 표지석 아래 카멜리아들이 시들지 않았거든요. 동백꽃이라고 하면 너무 슬픈 기분이니까 카멜리아라고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2. 왼쪽은 어디고 오른쪽은 어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