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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봄 Oct 25. 2024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간혹뭔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그럴 땐 하루를 마치고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좋지 않은 감정은 마음 저 밑바닥에 꼭꼭 숨겨 놓기 일쑤라 좀처럼 찾아내기 어렵다. '그거였구나!' 아까 점심때 그 사람그 상황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다의도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만나를 아무것도 아닌 듯 대하는 그의 말과 행동이 내 마음을 자극한 것 같다불편했던 감정을 인정해 주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이때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 슬픔과 연관 짓지 못하고 인정 욕구가 채워지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예닐곱 살 여자아이가 내 기억 속에 또렷해진 건 얼마 전이다또래보다 작고 통통하며 가무잡잡한 아이는 달동네 비좁은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도 하고전봇대 옆에서 말뚝박기도 했다지금 생각하면 무시무시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노래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술래가 높이 쳐든 고무줄을 넘으려고 두 손을 바닥에 짚고 물구나무서듯 다리를 쭉 뻗어 넘기도 했다그렇게 실컷 놀고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동그란 양철 밥상에 밥을 차려주곤 했다엄마가 끓인 짭짤한 된장찌개와 갓 지은 밥은 꿀맛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엄마가 없다돈을 벌러 갔다는 엄마는 하루 이틀 지나도 오지 않는다너무 멀어서 못 온다고 했다. '구미'라는데 거기가 어딘지얼마만큼 먼 곳인지 모른다집에 가도 엄마가 없으니 이상하다신나게 뛰어놀던 골목길도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다친구 집에 가도 재미가 없어 금방 돌아오곤 했다그렇게 얼마가 지나갔을까못 보던 옷을 입고 엄마가 돌아왔다엄마는 공사장에서 일하는 분들의 밥을 해 주셨다며 구미 함바집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놓으셨다긴 파마머리에 반팔 양장을 입고 웃고 있는 엄마가 웃고 있다. ‘엄마는 뭐가 좋을까?’      


아이는 말없이 웅크려 앉았다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어른들이 미웠다

엄마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나를 그냥 두고 가면 어떡해엄마가 돈을 벌어야 해서 너를 두고 가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야지왜 어른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안 해.’ 

아이의 눌러 놓은 마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지만 끝내 말하지는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아무도 내 마음이 어떤지 거들떠보지 않았어누구도 다독여 주지 않았어어둠 속에서 혼자 있는 동안 누구도 찾아주지 않았어얼마나 외롭고 무서웠다고.’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마치 물컹한 무언가를 토해내듯 큰 소리로 엉엉 운다.

      

나는 이제야 긴 시간 어둠 속에서 혼자 지냈을 여자 아이를 생각하며 꼭 안아주었다.

아이야오랜 시간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니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니 얼마나 슬펐니그렇다고 네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냐너는 사랑스럽고 아주 멋진 아이잖아이제부터는 내가 너와 함께할게언제까지나.’ 

어둠 속에서 두려워 떨며 꺼억꺼억 울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든다늘어진 몸에 조금씩 평안이 찾아온다. 

 

내가 어린 시절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분노’ 때문이다평상시엔 뭐라도 다 받아 줄 것 같은 사람이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반복적으로 분노가 차오르는 부분이 있었다그때부터 내 분노의 뿌리는 어디서 기인할까?’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더군다나 중년이 되어 부딪치는 현실 앞에서 결국 어릴 적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끝내 온전한 로 살아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그렇게 시작한 나의 분노의 뿌리 찾기는 어린 시절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만나게 했다.

    

이 글은 중년의 여성이 자신의 내면 아이를 만나고, 상처 하나하나를 치유하면서 점차 자기 돌봄의 여정을 펼쳐 나가는 여정의 첫 번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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