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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 Jan 03. 2020

동정보다 공감이 필요할 때

맥락 없는 동정심은 우월감일지도 모르니까요

한국어로 '불쌍하다'의 정의는,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슬픔을 느낄 만큼 처지가 어렵거나 불행하다.


영어로 동정에 해당하는 기본 단어는 sympathy, pity인데,

sympathy의 정의:

1. feelings of pity and sorrow for someone else's misfortune.

2. understanding between people; common feeling.

첫 번째 정의가 불쌍히, 가엾이, 딱하게 여긴다는 pity 감정이고,

두 번째 정의는 그저 사람 간에 서로 이해하며 가지는 일반적인 ‘공감’ '동감' empathy 비슷하다.

한국어나 영어 모두 정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불쌍하다는 말 pity는 누군가의 불운을 전제로 하는 감정이다. (*pity는 또한, 뭔가 일이 제대로 안되었을 때 실망 조로, 저런 안됐군, 이란 식으로도 쓰인다.)


비슷한 말, ‘동정’의 정의는 불쌍히 ‘여기는’ 외에도 동정을 베푼다, 즉 실제로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의연금처럼 불우한 사람에게 주는 돈이나 물자를 alms라 하고, 그런 행위는 almsgiving이라고 한다. 기부금 donation과 다른 부분은 도네이션은 내가 마음에 드는 정치가나 자연보호 등의 취지에 기부하는 것도 해당되지만, 암스는 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 선조의 브라더 세종대왕께오서 국민들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만드시기도 했듯, 불쌍한 것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자체는 아름다운 것일 것이다.

불쌍하다는 감정도 느낄 줄 모르면 정말이지 마음이 차가운 cold hearted person이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노력과는 상관없는 이유로 안타깝게도 재난 같은 것을 맞아 '불운'한 사람들이나, 나이로나 장애로나 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힘이 닿는 대로 도우려고 하는 것은 정말 훌륭하고 존경스럽다.


하지만 남을 함부로 불쌍하게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글자 그대로 값싼 동정은 매우 저렴하다.

뭔가를 줌으로써 내가 잃는 게 없는 것은 주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 아닌가!

이를테면, ‘솔까 사랑은 돈과 시간이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무조건 많은 돈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뭔가 내게 한정된 자원을 아까지 않고 쓸 준비가 되어 있어야 사랑한다고 볼 수 있다는 말이듯이 말이다. 명품백 사 내라는 게 아니야. 힘이 닿는 한 통통한 벌레를 물어오는 수컷 새처럼, 가진 것을 최대한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보자는 거지 멸종 직전의 장수하늘소를 물어오라는 게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수컷들은 삶의 많은 시간을 성행위가 아니라 성행위를 하려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모한다는 데 아니할 말로 그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고 거저먹으려고 하니까 범죄가 난무하는 거 아닌가.

얼마 전 선천적으로 양팔이 짧을 뿐 신체 건강한 코미디언의 스탠드 업을 보았는데, 자기가 햄버거를 시키려고 하면 직원이 갑자기 수화를 시작한다든가 (귀가 안 들린다고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한다거나, 괜히 눈물짓는다는 재미있는 개인적 에피소드들이 소재였다.

응원도 좋고, 도움의 온정도 좋은데, 실제로 괜한 값싼 동정에 되려 상처를 받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괜히 남의 삶을 미리 평가하고 불쌍하게 여기기도 잘하기 때문이다.


가령 시각장애자도, 가는 길에 방해가 안 되게 해 주는 것은 물론,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팔꿈치를 살짝 잡고 방향을 틀어주는 정도를 원하지 손이나 팔을 잡고 이끄는 것은 원하지 않고, 틱이나 자폐 증상 등 눈길을 끌 수 있는 문제를 가진 분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조언질이나, 섣부른 혀 끌끌 보다는 최대한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외려 ‘주목하지 않는’ 게 필요하듯이, 삶의 어떤 길목에 어느 정도 기간 어떤 처지에 있든, 그 어려움을  최대한 느끼지 않고 살도록 협조하는 게 중요한데 말이다.


장애든 가난이든, 청하지 않은 동정심은 친절함 kindness이 아니라 Superiority 우월감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문득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뭐 그렇게 '나쁘기'까지 한가 싶으실지 모르겠지만, 이해가 잘 안 가시면, 동양인은 즈이들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고 자신들의 삶을 부러워할 것이라는 백인들의 감정을 떠올려보면 섣부른 동정이 얼마나 misdirected feeling 잘못된 방향의 감정=착각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단지 그대보다 형편이 좀 못하다고 해서, 큰 병이 들었다고 해서, 뭐든 그대가 처한 상황보다 못한 것 같다고 해서 함부로 딱하게 여기는 감정은 무시와도 닮아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거보다는 내가 낫지, 에서 위안을 받는 뒤틀리고 부풀려진 자존감.

행복하기 위해서는 돈이나 건강, 학벌이나 지위 등이 갖춰져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


그 사람들이 볼 때는 니가 더 '불쌍'할지도 몰라, 얘.

니가 어때서 그러냐고? 얘가 왜 발끈하고 그래.

너는 그 사람 불쌍하고 그 사람들이 너는 불쌍하게 여기면 안 되니? 지금 니 기분이 바로 그 사람들이 느끼는 기분이야.

밤낮으로 지지하는 정권을 위한 사랑을 표현하는 집회를 가지기보다 살기 좋은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낙후된 주택들이 있는 골목길이 개발되는 것을 ‘정겨운 골목길’이 사라진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우습다. 그렇게 정겨우면 왜 좋은 아파트에 들 사려고 하나 정겨운 데서 사시지. 노인이 언덕길을 올라가는 줄 알고 손수레를 밀었는데 내려가는 중이었다는 우스개가 웃을 일만은 아니다.

추운 날 좌판에서 하나 더 팔아드리는 것도 좋지만, 장애인이나 노인들과 직접 생활을 해봐야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게 있고 (순 액체인 계란 한 판이 얼마나 무겁고 지하철 계단들이 얼마나 가파른지 아는가) 대중교통을 타고 다녀봐야 대중교통의 문제점을 알 수 있듯이, 빤짝 오오 나 기부했어 너무 착하지 않냐, 가 아니라 실제로 이슈에 ‘장기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아는 것이 있다. 불쌍하게 여기며 내킬 때 한 두 푼 내미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무엇이 도움이 될지 생각하고 그것을 도모하자.

지역의 시설을 개선하자고 국회의원에게 메일 하고 전화하고, 잘 지켜보고 있다가 다음 선거 때 잘 생긴 사람이나 선거 때마다 무릎 꿇고 잘못했다는 찌질한 사람 뽑지 말고 정말 지역을 위해 일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것.


something to pity on 불쌍하게 여길 일과 something to improve upon 개선해야  일들을 혼동하면  된다.


누군가에게 불운한 일이 생기면 처음에는 괜스레 기웃거리다가, 문제가 좀 심각해지고 실제로 '나의 희생이 요구되면' 외려 난처해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심리도 우습다. 이런 골라골라 싸구려 싸구려 떨이 값싼 동정심은, 심심하면 우리 엄마 불쌍하다고 징징거리면서 손 까딱 안 하고 엄마가 허리 아프게 차려 준 음식을 맛있게 ‘먹어드리는’ 자식, 명절에 설거지라도 도울 것이지 티브이 앞에서 굴러다니면서 자상한 목소리로 여보 힘들면 쉬면서 해, 소리나 하는 남편들과 닮아 있다.


기부 조금 하고 그들이 무지하게 고마워하기를 바라지 말고, 얼핏 나보다 좀 못한 사람 같으면 눈물바람 하면서 그걸로 자기가 착하다는 착각에나 빠지고 있지 말고, 무엇이 도움이 될지 능동적으로 생각해 볼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를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동정심이 묘하게 지나친 흐뭇함을 안겨주고 '자랑스럽다'면 그 감정의 순수도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우월감과 호기심과 많이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감정은 그래서 pity보다는 sympathy, 더 나아가 공감 empathy, compassion이다. 

미리 지레 '내려 봄'이 없이 처한 상황이 어려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에 수평으로 '공감'하는 것.

'내 일같이' 여기고, 따라서 '남을 돕는다'는 생각조차를 넘어 그저 바람직한 상황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때로는 내가 도와서 될 일이 아닌 것에는 '그렇게 사는 삶도 있거니' 그저 이해하는 것

cruel 무자비한 것을 merciless, ruthless, pitiless라고도 하지만 sociopath '공감능력' 없는 범죄자다. 인간다움은 공감력에서 온다.


반대로 self pity자기 연민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맨날 자기만 불쌍하다는 사람들. 자기만 억울하고 자기만 피해자연 하는 것을 victimizing, victimization 이라고도 한다. 자기를 victim피해자+ize로 만든다, 는 것이다.

살다 보면 피해를 보는 일도 있고 억울한 일도 있을 수 있는데, 끊임없이 징징거리는 것은 쓸데없는 걱정만큼이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항상 자기 탓이라는 것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만 모든 게 남 탓인 사람도 발전이 없다. 아무나 불쌍하게 여기는 것처럼 자기 자신도 불쌍히 여기고만 있으면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 늘 자기만 불쌍한 사람은 역으로 자아도취자, 나르시즘에 빠진 모습 narcissist과도 닮아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하늘이 무너지는 안타까운 상황도 있을 것이라 믿지만 (이 나이까지 살도록 막막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가짜 흙수저 타도 협회 회원 드림) 사고방식의 전환도 분명 필요하다. 그놈의 '소소한 행복 찾기'도 하루 이틀이지 지긋지긋한 것도 알지만 (안다) 그래도 현재 가진 것에서 최대한의 만족을 뽑아낼 수 있도록 우선순위를 점검해야 하고, 가난한 부모탓이나 더구나 뭐든, 내게 없는 그걸 '가진 놈'들 탓은 당면 문제에 도움이 안 되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곰돌이 가족이 원하는 것은, 그대가 불쌍하게 여기는 것도, 따뜻한 온정의 손길도(곰돌이도 여자도 아기도 분명히 만져달라고 하지 않으면 만지지마) 아니고 그저 인류의 멸망일지도.

+1

성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무슨 일이 터지면 여기저기 반짝 모금도 들썩들썩하는데 성금도 잘 살펴보고 내도록 하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천사라면 얼마나 재미있을

지는 몰라도 뭐 대충 딱히 나쁘진 않겠지만, 불행히도 자선사업도 '사업'인지라, 모금을 하는 곳의 상당수는 운영비를 제하고 실제 대상에게 10프로도 돌아가지 않는다. 환경보호 단체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 중의 하나인 개인 제트기를 타고 돌아다니며 자신들의 단체의 유지를 위한 로비에 돈을 쓰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비밀이다.

알래스카 이야기에도 썼지만, 북극곰만 위험에 처한 것도 아니고 특정 종의 벌레들도 멸종위기에 처했지만 이 단체들이 어린이 북극곰이 멀쩡하게 빙산 위에 있는 모습만을 내보내는 이유는 그러면 사람들이 더 돈을 잘 주기 때문이고, 일회용 기저귀를 쓰지 말자고 하지만 기저귀를 빨아서 생산하는 오수의 위험도 무시 못하며, 동물 보호를 위해 비건 가죽을 쓰자고 하지만 대신 비건 가죽은 썩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있는 가죽옷 두고 비건 가죽 사는 것, 자연보호를 위해 텀블러를 사용한다면서 유행 따라 노래 따라 철철이 텀블러를 바꾸는 것, 빨대가 환경에 안 좋다면 입 대고 마시면 되지 철 빨대 실리콘 빨대 사는 것은 모두 자연보호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성금 내자.  많이 내자.

내는데, 그런데 잘 살펴보고, 생각해보고 내자.


+2

참고로, '얼마나 애통하십니까'라는 공감의 말인 '삼가 조위를 표한다', 는 말은 my condolence.라고 한다.



 

값싼 동정이나 황당한 동정은 모두 외려 겸허하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다.

그러니 다음에는 겸손하다는 감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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