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메시지는 대타자로부터 우리에게,..., 전도된 형태로 돌아온다.
우리의 메시지는 대타자로부터 우리에게 전도된 형태로 돌아온다.
오늘 이야기는 에크리에 나오는 이 문장에서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꽤나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본문에 나오는 것도 아닌 <이 모음집을 열며>에 나오는 문장인 데다가, 보다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많음에도 말이다. 책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다가도 나도 모르게 다시 이 문장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렇게 나는 여기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몇 주 전, 거의 1년도 더 전에 썼던 글에 달린 댓글을 확인했다. 댓글이 달린 지도 상당 시간이 흐른 후였는데, 늦게 확인한 이유는 평소에는 알림을 꺼 놓고 지내고 필요할 때가 아니면 내가 쓴 글을 확인해 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달린 댓글이 썩 유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그저 내가 쓴 글의 이유를 전혀 파악하지 못 한 채 달린 문장이었고 비난하려는 의도가 약간 담겨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댓글을 읽고 어떤 감정을 떠올리기보다는 다시 이 문장을 떠올렸다.
"우리의 메시지는 대타자로부터 우리에게 전도된 형태로 돌아온다."
이제 이 문장에 대해서 내가 해왔던 생각들을 풀어 보려 한다.
먼저 가장 쉬운 해석부터 해보자. "우리의 메시지는 대타자로부터 우리에게 전도된 형태로 돌아온다"는 문장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란 '우리가 발화하는 내용이 이미 대타자로부터 각인된 메시지이며 우리는 그것을 반복할 뿐이다'일 것이다.
1.
우리는 흔히 자기주장을 할 때 그것이 '나의' 생각이고 '나의' 의견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발화되고 쓰여진 생각은 사실 나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존의 언어를 빌려 사용하고 있는 것일 뿐이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언어에 담긴 고정관념을 반복한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는 말 역시도 '자크 라깡'이라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의 말을 변주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쉬운 예를 들어보자. '외도는 나쁘다'라는 관념이 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외도는 나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일처제가 아닌 문화권에서 '외도'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외도는 나쁘다'라는 생각은 일부일처제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학습을 통해 얻게 된 결과인 것이다. '외도가 나쁘다'라는 생각은 온전한 나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기존에 있는 생각의 답습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유하기 이전에 이미 이 메시지를 대타자로부터 받았다. 이것이 역전된 이유는 타자로부터 주입된 생각임에도 '나'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외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 또한 적을 지언정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 역시도 하늘 아래 전혀 새로운 의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이 말을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내뱉기 전에 이미 외도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선재해 있었다. 외도는 나쁘다는 생각이 선재해 있었던 것처럼. 최초의 발화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지라도 어쨌든 이것은 '다른 사람(타자)'의 생각이다. 이 타자는 실체가 없다. 그리고 라깡은 이렇게 실체 없는 타자, 고정관념의 주인을 대타자라고 불렀다. 대타자는 결코 눈앞에 있는 현실의 사람이, 구체적으로 만질 수 있고 실존해 있는 누군가가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언어의 주인인 대타자를 만날 수 없다.
1의 논의를 조금 더 심화시켜 본다면 언표와 언표 행위를 통해 이 문장을 사유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언표(énoncé)와 언표화(énonciation) 또는 언표 행위(l'acte de l'énonciation)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구분해보자면 언표는 의식의 장을, 언표화 또는 언표 행위는 무의식의 장을 구성한다고 설명해볼 수 있다.
발화하고자 하는 추동과 발화된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발화하고자 하는 추동은 무의식의 장을 구성하고 발화된 것은 의식의 장을 구성한다. 내뱉은 말(언표)은 언제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 말하도록 이끄는 무의식적 욕망을 조금씩 빗겨 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표 되지 못한 것들이 불러일으킨 결핍의 감각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발화하도록 만든다. 입 밖으로 꺼내어진 문장이 무의식의 영역을, 내가 의도한 바를 정확히 명중시켰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말하고 싶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고 싶은 말이 남게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그 즉시 우리는 대타자의 장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언어는 나의 것이 아니다. 언어는 타자의 것이다. 말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만드는 그 무엇은 입을 열고 발화하는 순간 그 즉시 왜곡되어 상징계에 포섭된다. 따라서 이미 언어로 발화된 문장은 그 자체로 발화 행위를 전도/굴절시켜 버린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메시지는 대타자로부터 우리에게 전도된 형태로 되돌아온다. 상징계는 나의 언어가 아닌 대타자의 언어이므로.
라깡의 유명한 L 도식으로도 이 명제는 설명이 가능하다. L 도식을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여기서 나는 '주체의 위치'와 '우리 메시지는 대타자로부터,..., 전도된 형태로 온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해석해보고자 한다.
내가 눈앞에 있는 소타자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내 학생이야'라고.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내가 발화한 말에 긍정하여 고개를 끄덕인다면 이로써 발생되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나', '주체'의 위치 고정이다. 상대방이 내가 발화한 명제를 긍정하는 순간, 나의 위치가 '너의 선생'으로 고정되어 버리기 때문에. 이 위치를 고정시키는 것이 언뜻 보기에 내가 말을 건넨 상대방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이 고정점은 눈앞에 있는 소타자가 아닌 대타자로부터 기인한다. 이것이 바로 발화된 명제의 기능이자 전도된 형태로 확정되는 주체의 자리이다.
그리고 이 명제를, '이 모음집을 열며' 다음에 이어지는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와 또다시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 하나의 문장은 다른 하나의 문장과 연결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게 되고 다른 맥락 속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메시지는 대타자로부터,..., 전도된 형태로 온다'는 이 문장을 이어지는 에크리의 첫 번째 챕터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와 연결시켜 본다면 1과 2와 3과는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소설을 분석한 글로 라깡은 에크리를 시작한다.
소설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왕비가 누군가로부터 어떤 "편지"를 받는다. 그런데 그 순간 왕이 방으로 들어온다. 이 편지는 왕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은밀한 편지이기 때문에 왕비는 이 편지를 감추기 위해 다른 편지 더미 속에 이 편지를 뒤집어 놓게 되는데, 왕과 함께 들어온 대신이 왕비와 편지의 관계에 대해 눈치채게 된다. 편지 더미를 뒤적여 보는 척하다가 대신은, 자연스럽게 왕비가 뒤집어 놓은 문제의 그 편지를 다른 편지와 바꿔치기함으로써 슬쩍 훔친다. 왕이 편지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되므로 왕비는 대신을 제지하지 못한 채 그가 훔쳐가도록 내버려 둔다. 거기서 대신을 제지하는 순간 편지의 존재는 왕에게 발각될 테니까.
편지를 소유한 대신은 동시에 왕비에게 휘두를 수 있는 권력도 획득하게 된다. 편지를 왕에게 공개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협박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왕비는 이 편지를 회수하기 위해 편지에 대한 현상금을 걸고 되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경찰이 대신의 집을 수색했음에도 편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자로 공간을 재단하고 집안 곳곳을 수색해도 편지가 어디에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편지를 뒤팽이라는 사립 탐정이 대신에게 훔쳐 경시청장에게 돈을 받고 건네줌으로써 이야기는 끝이 난다.
여기에서 라깡이 강조하는 바는 주체에 대한 상징계, 문자의 우위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마치 편지(문자, 상징계)를 소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편지의 행방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라 주체의 위치와 역할이 결정되고 또 변경되기도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여왕의 위치는 편지의 수신자이자 보관 중인 자에서 (라깡은 왕비에게조차 편지의 소유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편지는 정해진 수신자가 없이 그저 보관 중인 뿐이다. 왕비조차도. 여기서 문자, 기표, 상징계는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원문에서는 en souffrance라는 표현을 쓰는데 souffrance라는 단어 자체만 보면 여기에는 고난이라는 뜻이 있다. 이로 인해 편지를 보관 중인 자는 편지로 인한 고난을 - 도난당할 위험, 훔치는 자로부터 지켜내고 숨겨야 하는 수고를 치루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고난을 - 격게 된다는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도둑맞은 자로 그 위치가 바뀌었고, 대신도 편지를 훔치는 자에서 보관 중인 자로 그리고 또다시 도난당한 자로 그 위치가 변경된다. 그리고 주체의 자리를 바꾸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편지 자체이다.
이제 이 내용과 '우리의 메시지는 대타자로부터 우리에게 전도된 형태로 돌아온다'라는 의미를 연결시켜 보자.
뒤팽은 대신의 집무실에서 마치 여왕에게서 훔친 편지가 아닌 것처럼 위장된 편지를 알아본다. 그 길로 실수로 잊은 척 목도리를 두고 방을 떠난 뒤팽은 다음날 그와 똑같은 모양의 편지를 위조하여 다시 방문하고, 계획된 소란으로 대신의 주위를 창문 밖으로 돌린 뒤 편지와 편지를 바꿔치기한다. 그 즉시 대신은 편지를 훔쳐서 소유한 자에서, 편지를 도둑맞은 자로 그 위치가 변경된다. 그것도 정확히 자신이 왕비에게 썼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대신의 위치는 왕-왕비-대신이 있던 장면에서 왕비의 위치로, 편지를 도난당한 자의 위치로 그 위치가 전도되어 버렸다. 얼핏 생각하기에 대신의 위치를 편지를 보관 중인 자에서 편지를 도난당한 자로 바꾸는 것은 뒤팽처럼 보이지만, 라깡에 의하면 이 구조를 만드는 것은 편지이다. 왜냐하면 편지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뒤팽이라는 편지를 훔치려고 하는 자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문장에서부터 출발한 내가 도달한 장소는 주관적인 경험이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최근 내 글에 달린 댓글을 보았고 그 글에서 다시 이 문장을 떠올렸다.
나에게 돌아온 답변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혀 이야기하지 못한 엉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2. 언표와 언표행위>에서 나는 주체가 발화하는 순간, 글을 써내려 가기 위해 키보드를 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왜곡이 일어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음성으로든 활자로든 우리가 이해 가능한 형태로 내뱉어진 순간 그것은 상징계, 대타자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 되기 때문에.
따라서 내가 겪은 댓글 사건(이것을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면)에는 두 번의 왜곡이 있게 된다. 언표 행위→언표 과정에서 한 번, 그리고 언표화 된 나의 언어가 다시 상대방에게 이해되어 의미화될 때 또 한 번. 물론 상대방의 댓글을 읽고 내가 이해한 의미 체계에도 왜곡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타자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타자의 말을 포획하고 의미를 고정시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게 되는 일이다. 의미화되고 이해된다는 것은 언제나 오인을 전제하는 일이므로.
해당 내용에 대해 유튜브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